유가족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투명치 못한 자금 운영 방식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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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소속 유족 대표 황상기씨를 11일 오전 12시께 강원도 속초시 그의 집에서 만났다. 황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백혈병으로 숨진 딸 황유미씨의 아버지다.

    택시 영업을 하다 인터뷰를 응하러 왔다는 황씨는 기자를 길모퉁이 허름한 집으로 안내했다. 집 천장을 나무 합판으로 덧댔지만, 깨지고 갈리진 틈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위태로워 보였다. 벽면 역시 성한 구석이 하나 없었다.

    황씨는 "10년 전 모아둔 돈으로 집을 고치려 했지만, 딸 병원비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면서 "비 바람이 줄줄 세는 집이지만 지금 형편으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도 우울증에 걸려 있는데다, 반올림 회의 때문에 서울을 자주 들러야 해 완전 빈털터리다"고 고백했다. 황씨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빈 지갑을 채워주는 일인 듯했다.

    하지만 황씨가 언제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기약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풀겠다고 나선 반올림이 '사고 예방책'이 담보되기 전까진 보상과 관련한 어떠한 협상도 벌일 수 없다는 식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반올림은 소위 활동가로 불리는 4명과 황씨를 포함한 유가족 2명으로 구성돼 있다.

    반올림과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삼성전자는 논의가 시작될 무렵부터 일찌감치 충분한 보상을 약속한 상태다. 나머지 협상 주체인 가대위(삼성 직업병 가족 대책위원회)도 삼성전자의 뜻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사고 예방책'에 대한 만족도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입장차를 좁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인 셈이다. 때문에 전체 유가족 8명 중 6명이 속한 가대위는 보상을 받고 난 뒤 사고 예방책을 세우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황씨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유가족들과 달리 반올림과 한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반올림에 황씨가 끌려다니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황씨는 최근 반올림의 인터넷 카페에 "조정위원회의 보상 권고안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권고안에 '환영한다'는 뜻을 내놓은 반올림과 반대되는 의견을 즉각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언론들도 일제히 '반올림 분열'을 주제로 기사를 곧바로 쏟아냈다.

    권고안은 삼성전자가 1000억원을 기부해 공익법인을 설립한 뒤 이 법인이 임명하는 옴부즈맨들로부터 내부 점검을 정기적으로 받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황씨는 이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권고안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글을 쓴 게 아니다"며 "삼성이 조정위와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같은 글을 남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황씨는 조정위 권고안이 나온 후 바로 다음날인 지난달 24일에도 한 인터넷 방송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권고안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보상 규모가 적다는 지적을 시작으로 공익법인 설립 역시 삼성으로부터 직접 보상을 받으면 될 일이기 때문에 필요치 않다고 선을 그었다. 입장을 번번히 뒤집으며 오락가락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인터뷰 도중에도 황씨에게 의심스러운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 반올림에 부정적인 기사를 자주 쓰는 곳이니 인터뷰에 응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반올림은 후원금 사용 내역을 유가족들에게조차 공개하지 않아 빈축을 사고 있다.

    가대위 한 관계자는 "우리 측 6명 모두 후원금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유가족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반올림이 독단적으로 관리하고 사용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식 또는 남편을 잃은 유가족 대부분이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인 점을 감안하면 투명치 못한 자금 운영 방식은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 유가족은 "피해 가족을 돕겠다고 나선 반올림이 이제는 자신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가족을 보상에 눈 먼 사람 취급하고 있다"면서 "가족 잃은 우리 입장에선 보상 문제를 입에 올릴 때마다 무척 힘들 수밖에 없는데, 반올림이 무슨 자격으로 유가족을 비난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8명의 유가족 중 6명이 등을 돌린 반올림은 현재 황씨가 있어야만 협상에 참여할 명분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른 유가족 목소리는 듣지 않고 공익법인 설립에만 집중한다면, 황씨를 볼모로 사회적 문제를 풀겠다는 의심만 받게 된다.

    반올림은 그동안 청정지역으로만 알고 있었던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건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해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작업환경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다.

    하지만 2007년 10월 이후 8년만에 조정위의 권고안이 나왔고, 삼성전자 역시 1000억원의 기금을 약속한 상황에서 또 다시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안 된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최우선으로 배려해야 한다. 이제는 유가족들을 놔 줘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