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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싼 '직업병 갈등'이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난데없이 등장한 공익법인 설립 문제가 실타래를 더 꼬이게 하고 있다.
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이번 직업병 갈등을 풀겠다고 나선 조정위원회는 지난달 23일 삼성전자가 1000억원을 기부해 공익법인을 설립한 뒤, 이 법인이 임명하는 옴부즈맨들로부터 내부 점검을 정기적으로 받도록 권고했다. 조정위는 당시 10일간의 숙려기간을 주며 이해당사자 측에 수정안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숙려기간을 거친 후 삼성전자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통 큰 보상을 약속했다. 조정위 권고안 내용 가운데 공익법인 설립에 대한 요구만 비켜갔을 뿐 대부분 수용했다.
먼저 반도체 사업장에서 근무하다 질병에 걸린 삼성전자 직원은 물론 협력사 근로자까지 보상 범위에 포함시켰다. 산업 안전과 보건 향상을 위한 별도 사업을 펼치는 등 사고 예방 활동에도 전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했다. 1000억원에 달하는 사내 기금을 조성해 이 같은 일을 모두 해내겠다는 게 삼성전자 측의 구상이다.
이번 결정에 대해 삼성전자와 함께 협상 주체 중 한 곳인 가대위(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도 '전향적 입장'이라고 평가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내놨다.
하지만 나머지 협상 주체인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인권지킴이)만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갈등 해결의 열쇠와 동떨어진 공익법인 설립을 주장하며 한 발자국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난 직업병 논란은 비슷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그동안 크게 불거져왔다. 판단 기준 자체가 없다보니 이해당사자 사이 입장차를 좁히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과 같은 희귀질환이 번졌다고 볼 만한 명확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 노광 장비를 세척하는 과정에서 근로자들이 장갑을 끼고 손으로 만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발생하는 냄새에 유독가스가 들어있다는 주장이 있는 건 사실이다"면서 "그러나 이 가스가 백혈병의 원인이라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이나 대만 등 해외 다른 공장도 라인 구조나 환경이 삼성전자와 유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라인에 사용하는 재료조차 크게 차이가 나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는 국내 반도체 공장이 허술하게 관리돼 병이 생겨난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삼성전자는 이 같은 반도체 업계 안팎의 시각과 법적 잣대와 달리 인도적 관점에서 빠르게 보상하는 길을 택했다. 이런저런 인과관계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병에 걸린 근로자 편에 서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공익법인 설립은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선 공익법인의 활동이 현행 법과 겹치기 때문에 중복 규제를 받을 염려가 크다.
법적 권한 없는 민간단체가 기업 돈으로 선심 쓰듯 보상 규모를 책정하고 기업을 옥죄는 것 역시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제2, 제3의 공익법인 탄생의 도화선이 될 우려도 있다.
하지만 반올림은 공익법인 설립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은 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만 집중하는 모양새다. "8년을 끌어온 문제인데 공익법인 설립 자체가 시간을 끈다는 식으로 여겨선 안 된다"는 게 이들의 논리다.
서울 시내 한 노무사는 "현실성 없는 공익법인 설립은 문제를 더 꼬이게 할 뿐"이라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의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공익법인을 두고 헛힘만 쓸게 아니라 보상이 서둘로 이뤄지는 쪽으로 뜻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