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항편 수 급증했지만 5천㎞ 이상 장거리 한편도 없어슬롯 포화 의식한 저비용항공의 묻지마식 증편만
  • "홍콩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예정시간보다 일찍 김해공항 상공에 도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후 실제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비행기가 몇 바퀴씩 공항 하늘을 도는 바람에…"

    지난달 국내 모 저비용항공을 이용해 홍콩여행을 다녀온 A씨(50)의 얘기다. 그는 "명색이 대한민국 제2의 국제공항인데 매번 해외를 다녀올 때마다 이런 일을 겪는다"라고 불평했다.

    그는 또 "도대체 몇 대가 같은 시간대 도착했는지…. 엄청난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리는 바람에 짐 찾는 데도 한참 걸려 옆에 있던 외국인들도 한마디씩 불평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군 공항인 김해국제공항은 이착륙 금지시간(curfew) 적용을 받아 오전 6시 이후 활주로가 열린다.

    관제탑은 먼저 도착한 비행기부터 활주로 착륙을 안내한다. 최근 커퓨 해제 직후 김해공항 도착 편 비행기만 15편에 달한다. 이 때문에 비행기가 조금 늦게 공항 상공에 도착하면 A씨와 같은 경험을 하기 일쑤다.

    김해공항은 왜 불편한 공항으로 여겨질까?

    원인은 간단하다. '비좁은 김해공항을 대체할 신공항 건설이 필요하다'는 영남권 신공항의 당위성 확보를 위해 시설 한계에도 활주로를 무한정 열어젖힌 탓이 크다.

    하지만 활주로를 열어놓자 국내외 대형 국적항공보다는 거점공항이 마땅찮은 국내 저비용항공만 대거 들어와 진을 치는 바람에 지금 김해공항은 '저비용항공 특화 공항'이라 불릴 정도이다.

    국제선만 놓고 보면 주 1154편(10월 말 기준) 중 에어부산, 제주항공, 진에어, 이스타항공 등 국내 저비용항공 운항편 수가 586편으로 절반이 넘는다. 우리나라 저비용항공의 짧은 역사를 고려하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등 대형국적 항공사 294편, 18개 외국 항공사의 272편을 압도하는 수치이다.

    더욱이 최근 김해공항 슬롯(slot, 이착륙 허용 능력, 운항편 수 배정 기준)이 곧 포화상태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자 슬롯을 선점하려는 저비용항공사들이 노선 확충에 경쟁적으로 나서 활주로는 물론 하늘길이 더 복잡해졌다.

    2014년 1546편(국제 752편, 국내 794편)이던 주 운항편은 올해 최대 1994편(하계 기준, 국제 1042편, 국내 952편)을 기록하기도 했다. 올겨울에는 더 늘어난다. 총 2101편(국제 1146편, 국내 955편)의 동계 비행 스케줄이 잡혀있다. 이는 사용 가능 슬롯 2374편의 88.5%에 달하는 수치다.

    이에 대해 공항 관계자들은 '항공기 연결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한계 상황으로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인천공항 슬롯 배정률이 64%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김해공항이 어느 정도 붐비는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김해공항 슬롯을 선점하려는 항공사 간 경쟁이 갈수록 심화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활주로 1개와 국제선터미널 등을 신설하는 김해공항 확장 공사(김해 신공항 프로젝트)는 2026년쯤 완공된다. 따라서 조만간 김해공항 신규취항이나 증편이 어려워질 수도 있는 만큼 항공사 간 선점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올 겨울 김해공항 스케줄을 보면 섬이라는 한정된 지역적 한계 때문에 아웃바운드 수요가 부족한 제주항공이 그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김해공항발 노선 신설과 증편에 나서고 있다. 제주항공은 김해공항을 거점공항으로 삼기 위해 다음 달 3편의 국제선 노선을 신설한다.

    이에 뒤질세라 이스타항공, 에어부산, 진에어 등도 주 30여 편의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중국 산야, 일본 기타큐슈행 노선 개설로 맞선다.

    증편 경쟁 역시 뜨겁다. 제주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 진에어 등이 기존 10개 노선에 주 110여 편의 비행기를 증편할 예정이다. 에어부산 등 일부 항공사는 올겨울 부정기편까지 띄울 계획이다.

    공항이용객 입장에서도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노선이 늘어난 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등 편의성이 어느 정도 개선되는 건 분명하다. 더욱이 저비용항공을 주로 이용하는 알뜰 여행객은 값싼 요금으로 국제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어 오히려 반길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무차별적인 노선 경쟁이 비일비재한 비행기 출·도착 지연, 만성적인 주차난, 앉을 자리를 찾아보기 힘든 터미널 등 김해공항의 고질적 문제점을 가중할 것이라는 것이 공항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사실 공항의 외형적 성장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저비용항공사들만 우글거리다 보니 수익성 면에서 리스크가 있는 장거리 노선이 전무하다. 12개국 42개 도시, 1154편에 달하는 국제선 중 장거리 노선은 단 한편도 없다.

    28개 노선 880편이 비행 거리 2500㎞ 미만의 단거리 노선이며, 나머지 14개 노선, 주 304편도 2500∼5000㎞ 중거리 노선이다. 목적지도 단출하기 짝이 없다. 괌과 사이판 블라디보스토크, 울란바토르 4개 노선을 제외한 모든 노선이 일본, 중국, 동남아에 몰려 있다.

    5000㎞ 이상 장거리 노선이 한편도 없는 국제공항이다 보니 미주나 유럽지역을 여행하는 여행객은 김해공항에서 인천이나 일본으로 가서 갈아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제2 관문공항'은 허울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여행·관광업계는 물론 항공업계조차도 '이제 양적인 성장이나 확충보다는 공항의 질을 개선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부산시 역시 취항 인센티브 제공 등을 내걸고 장거리 노선 개설에 힘을 쏟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모 여행사 관계자는 "올해 말 김해공항 이용객이 개항 이래 최대인 1천5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한다"라며 "2026년 김해 신공항이 개항할 때까지 국제공항이자 관문공항이라는 타이틀에 맞게끔 시설 보완은 물론 항공업계와 이용객 수요를 적절히 수용하는 공항 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