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처칠 언급하며 자화자찬하더니… '정치적 협상' 한계 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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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는 이번 협상 성과를 과거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고려 서희 장군의 담판 등에 빗대 설명했다. 하지만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가 추진되는 상황이 겹쳐 미국에 양보하고 끌려가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2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각) 2018년 '국별 무역장벽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는 매년 미국 내 이해관계자가 제기하는 외국시장 진출 애로사항을 담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60여개 교역국을 대상으로 작성한다.
올해 보고서에는 블루베리와 사과, 배 등 일부 미국산 과일의 한국시장 접근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USTR은 우리나라 농림축산식품부 등에 미국 오리건주(州) 외의 주에서 생산하는 블루베리를 비롯해 현재 수입이 금지된 사과와 배에 대해 한국시장 접근 개선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수입 허용을 위해 한국을 계속 압박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산업부는 보고서가 예년 수준에서 무역장벽을 언급했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나섰다.
하지만 정부가 자동차 시장을 양보하는 대신 철강 관세와 농업분야를 지켰다고 자화자찬한 이후 환율 관련 이면합의 문제가 제기되는 등 실익 없는 협상결과라는 지적이 잇따르는 상황이다.
미국이 민감한 농산물 분야를 다시 건들려 추가적인 실리를 챙길 거라는 의견이 제기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오하이오주 대중연설에서 사실상 타결했다고 발표한 한미 FTA 개정협상에 대해 "훌륭하다"고 자평한 뒤 불쑥 북미대화와 한미 FTA의 연계를 시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상대방이 놀랄만한 엄포를 놓고는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하는 게 트럼프 특유의 협상기법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 FTA 개정협상은 정부 발표 이후 뒷말이 무성하다. 앞서 로이터통신이 한미 FTA 협상 부속합의로, 수출경쟁력 강화와 원화의 평가절하를 억제하기 위해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 관련 투명성을 확대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보도하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자유한국당은 "미국에 명분을 주는 대신 우리가 얻었다는 실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미국에 환율개입 억제를 약속했다는 이면계약 이야기까지 나오니 정부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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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협상에서 미국산 '혁신적 신약'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으로 우리나라 건강보험 약값 제도를 일부 고치기로 하면서 국내 환자의 약값 부담이 높아질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계 거대 다국적 제약사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신약의 보험 약값이 오를 수밖에 없고, 이는 환자의 경제적 부담과 건강보험의 재정 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이번 협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트럼프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특히 환율 관련 문제를 미국의 뜻대로 협상테이블에 올렸다면 앞으로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정부가 환율 개입 관련 협의와 한미 FTA는 별개라고 선을 긋는 것과 관련해선 "과거 FTA 협상에서 비공식적으로 쇠고기 양허협상이 이뤄진 것처럼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이라 해도 서로 연계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번 협상에 뒷말이 무성한 것에 대해선 "협상 이후 계속 다른 말이 나오는 건 한미 모두 (경제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해서 그런 듯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