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무시행으로 유럽항로 운항 직원은 '워라밸' 가능육상직원(사무직)에게만 해당…해상직원(선원)은 선원법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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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상선
    본지는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한달 앞두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겪게 될 삶과 근무환경의 변화를 미리 살펴본다. 소득 감소와 고용 불안 등 부정적 영향도 예상되고 있지만, 워라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기대반 우려반이 공존하고 있는 곳도 있다. 주52시간 시행이 가져올 각 분야별 변화를 기획 시리즈로 짚어본다. <편집자주>

    새벽 공기마저 따뜻한 7월의 어느 날, 적막이 감도는 사무실 안은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이내 입이 찢어질 듯한 하품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는 5년차 대리 A씨, 시계를 잠깐 보더니 뭔가 생각난 듯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현재 시각은 새벽 3시 50분, 해운업계 중에서도 벌크 선사에서 일하고 있는 A씨는 퇴근 10분 전인 이 시간이 가장 즐겁다. 정부가 이번달부터 주 52시간 근무시행에 들어가면서 이제 더 이상 '눈칫밥'을 먹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사실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즐거움은 꿈도 못 꿨다. A씨는 유럽 중에서도 한국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칠레 항로 운항을 담당하고 있다. 일이 있을 때는 새벽 근무가 흔한 일이다. 새벽 1시는 기본이고 꼬박 밤을 새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다음 날 출근 시간에 대한 부담은 그대로였다. 말로는 다음 날 오전 근무를 면제해준다고 하지만, 선배나 동료들 눈치를 보느라 마음 놓고 쉬어 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오전 회의가 있는 날이면 남들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야 한다.

    밤낮이 바뀌어서 생활패턴도 엉망이 됐다. 선배들이 "너네들은 그나마 낫다. 예전에는 이런 편의도 봐주지 않았다"며 큰소리 칠 때면 원망스럽기도 했다. 말만 탄력근무지 회사에서 확실히 정한 기준이 없어 답답한 노릇이었다.

    가끔 컨테이너 선사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만나서 술 한잔 기울이다 보면, A씨는 '그 쪽도 별반 다를 게 없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힘을 내곤 했다. 하지만 늘 마지막은 동료들의 농담 섞인 위로로 끝났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린 너보단 낫다"

    그렇다. 흔히들 컨테이너 선사는 버스, 벌크 선사는 택시로 비유한다. 컨테이너 선사는 이미 짜여진 항로에 배를 투입하는 반면, 벌크 선사는 계약에 따라 항로를 운항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파트너 쪽 데이터에 맞춰 일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프로젝트성 업무라도 있는 경우, 밤을 새는 일이 잦다. 일례로 장기 계약 수송 건이 나오면 입찰을 따내기 위해 회사 전체가 분주하다. 이런 기간에는 언제 어디서 예측불허의 상황이 생길지 몰라 상시 비상 대기하는 일도 기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 52시간 근무제가 해운업계에 적용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개정안은 육상직원(사무직)에게만 적용된다. 해상직원(선원)은 별도의 선원법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A씨 주위에는 9시 출근 6시 퇴근이 일상화된 직원들도 대다수다. 이들은 '워라밸'을 충분히 즐기고 있을 터, 이번 개정안이 발표되자 A씨와 같은 직무를 담당하고 있던 직원들만이 소리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과정은 길었다. 해운업은 서비스업으로 제조업과 달라 다른 대기업들이 유연근무제 등을 도입할 때도 여전히 고심이 깊었다. A씨 회사 인사팀 직원도 시행 한달 전인데도 "현재 방안을 검토 중이며, 결정된 바는 없다"는 원론적인 말만 반복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회사는 그나마 A씨에게 눈치를 보는 수고를 덜어줬다. 대신, 다음 날 오전에 어떤 식으로 피로를 풀 지 생각하는 여유를 선물해 줬다고나 할까. A씨는 만족스럽다.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새벽 4시, 며칠 동안 계속된 야근에 A씨의 피로는 극에 달했지만 역시나 퇴근은 꿀맛같다. A씨가 향하는 곳은 집, 푹 자다가 집 근처 사우나에 들러 피로를 푼 뒤 회사에 출근할 예정이다. 오전 회의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