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E 보고서 거론 … 쌀·소고기 협상 테이블 오를 가능성 영국, 미국산 농축산물 시장 대폭 개방 영향 '예의주시'농민단체 "더이상 농업계 희생 강요해선 안돼" 강력 반발전문가 "韓 민감분야 꺼내 실익보다 압박용 카드로 활용"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AP/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AP/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최근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관세 기술(실무)협의에서 한국 측에 다수의 '비관세 장벽' 해소를 공식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미국이 앞서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 보고서)에서 지적한 사안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국민 정서상 민감한 소고기와 쌀 수입 규제 완화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협상 과정에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는 가운데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강한 반발도 우려된다.

    26일 정부 등에 따르면, 지난 20~2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정부 간 제2차 실무협의에서 미국 측은 자국 무역대표부(USTR)가 발간한 NTE 보고서에 언급된 비관세 무역 장벽을 거론하며 한국 측에 해소 노력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NTE 보고서에는 30개월 미만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제한, 수입차 배출가스 규제, 구글의 정밀지도 반출 제한, 의약품 가격 책정 정책, 무기 수입 시 기술 이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절충교역' 등 다양한 사안이 한국의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돼 있다. 미국이 이번 실무협의에서 제기한 요구 역시 이 보고서를 토대로 한 것으로, 이번 협의에서 소고기와 쌀 수입 규제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이 지적한 대표적 비관세 장벽은 소고기 수입 규제다. 미국 정부는 NTE 보고서를 통해 한·미 소고기 시장 개방 합의 당시 한국이 월령 30개월 미만의 소고기만 수입하도록 한 조치를 '과도기적 조치'로 규정하면서, 해당 조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제기해 왔다. 또 한국이 육포, 소시지 등 소고기 가공품에 대해서도 월령과 관계없이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미국은 한국의 쌀 수입 정책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현재 쌀에 513%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대신 저율관세할당(TRQ) 물량인 연간 40만8700톤(t)에 대해서는 5%의 관세를 적용하는데, 이 중 미국에 배정된 물량은 13만2305t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상호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국의 쌀 관세율을 거론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산 쌀에 최대 50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어떤 경우는 적국보다 우방이 더 나쁘게 우리를 대우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는 이번 주 초반 범정부 차원의 대책 회의를 열고 한·미 실무협의 결과를 공유하는 한편, 미국 측 요구 사항 가운데 우선순위를 분석해 차기 정부에 넘길 계획이다. 한국은 미국산 수입 확대를 통한 무역 불균형 해소와 조선 산업 중심의 전략적 협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이 예고한 25% 상호관세 부과 조치와 품목별 관세에서의 면제를 막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문제는 소고기와 쌀이 국내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이다. 미국 측이 이들 농산물에 대한 시장 접근 확대를 요구할 경우, 협상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고기와 쌀 수입 규제 완화를 둘러싼 논의가 본격화될 경우,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강한 반발도 예상된다.

    앞서 미국은 영국과의 무역 합의를 통해 영국산 철강·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완하고 영국은 대미 농축산물 시장을 대폭 개방하기로 했다. 영국은 기존 1000t 소고기 수입 쿼터에 부과되던 20% 관세를 철폐하고, 미국산 소고기에 대해 1만3000t 규모의 특혜 면세 쿼터를 신설하기로 했다. 또한 미국산 농산물의 시장 접근 확대를 위해, 비관세 장벽으로 꼽혀온 동식물 위생·검역(SPS) 기준을 준수하고 공식적인 양자 협력 채널도 강화하기로 했다. 

    이에 한미협상에서도 농축산업 분야가 주요 협상카드로 떠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농민단체들은 농업계 희생을 강요해선 안된다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 

    강정현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사무총장은 "이미 농업시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충분히 개방된 상황"이라며 "쌀은 FTA 협상 과정에서 유일하게 민감품목으로 지켜낸 것이고 미국산 소고기는 내년이면 관세가 0%가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기에다 소고기 월령 제한까지 폐지된다면 농가가 심각한 위협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며 "쌀과 소고기 수입 규제 완화에 나선다면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축산업계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규제 완화가 국내 축산업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서영석 전국한우협회 정책국장은 "한미 FTA로 내년부터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관세가 0%가 되는 상황에서 30개월령 이상 소고기까지 수입이 허용되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불신이 한우로까지 번질 수 있다"며 "농림축산식품부도 미국 측의 농업 부문 비관세 장벽 완화나 철폐 요구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요구가 현장에서 강하게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권 이양기를 앞둔 상황에서 무리한 양보보다는 협상 일정을 최대한 늦추며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제조업 살리기'를 내세워 관세 협상에 속전속결로 임하고 있지만 한국이 이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휘말리기보다는 주요국의 대응을 지켜보며 협상에 시간을 두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은 FTA 등을 통해 이미 농업 분야에서는 미국 측에 상당한 양보를 해온 만큼 국내적 논의와 조율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근 일본에서도 쌀 자급률 하락 이후 쌀값이 폭등한 사례가 있었던 만큼 식량주권 관점에서 이러한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 압박 배경에 대해 '본질은 관세가 아니라 미국 내 투자 유치'라고 진단했다. 곽노성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명예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최대 압박 전략'을 통해 일단 강하게 밀어붙인 뒤 상대가 맞서면 한발 물어서는 식으로 협상 주도권을 쥐는 방식"이라며 "궁극적인 목적은 미국 내 고용과 투자 유치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쌀과 소고기 같은 농축산물의 경우 한국은 가장 민감한 분야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수출 효과가 크지 않아 실익보다는 압박용 카드로 쓰는 것"이라며 "결국 미국이 진짜로 얻고자 하는 것은 한국의 대미 투자 확대로, 미국이 전략적으로 필요로 하는 조선·원전 기술 협력을 대안 카드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미국은 조선업은 쇠퇴한 상태고 2050년까지 미국 원자력 발전용량을 4배 늘리려는 상황이어서 기술력이 뛰어난 한국의 도움이 필수적인 만큼 정부가 이같은 핵심 분야를 협상에서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