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린 방산 외교… 점진적 정상화 추세KAI 軍 출신 CEO 조기 퇴진, 사장 공석 장기화유럽·미국 시장 공략 과제… "국가 신뢰도 높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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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2 전차. 자료사진 ⓒ현대로템
한국 방위산업은 최근 몇 년 새 'K-방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무기 시장의 전면에 올라섰다. 전차·자주포·전투기·유도무기 등 주요 무기체계가 동유럽과 중동, 동남아시아에 잇따라 수출되며 수주·실적 모두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그러나 2024년 말 계엄 사태를 전후해 한국의 정치·제도 안정성에 의문부호가 찍히면서 방산업계는 한동안 적지 않은 충격을 겪었다. 정상외교와 장관급 협의가 잇따라 흔들리고, 일부 대형 사업은 협상 시점이 늦춰지는 등 산업 전반에 ‘정치 리스크’가 상수로 떠오른 것이다.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업계 안팎에서는 큰 파고를 넘기고 서서히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 다만 계엄이 남긴 상처와 과제가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제도 신뢰를 복원하는 작업이 K-방산의 다음 과제로 남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계엄 직격탄 맞은 방산 외교… 1년 지나며 외교 채널은 재가동계엄 직후 가장 먼저 흔들린 것은 정상외교와 장관급 방산 협의였다. 국방·안보와 직결된 일정일수록 국내 정치 상황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한국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당시 방한 중이던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사디르 자파로프는 예정돼 있던 방산 업체 방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다음 날 귀국하는 일이 빚어졌다. 자파로프 대통령은 방한 기간 중 국내 기동헬기 ‘수리온’을 생산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사천 공장 방문과 헬기 시승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일정은 K-방산의 수출 확대를 위한 핵심 마케팅의 일환이었다.이외에도 스웨덴 총리의 방한이 취소됐고, 중앙아시아 국가와 계획돼 있던 국방장관급 방산 협력 회담도 갑작스럽게 제외됐다. 미국 국방장관의 방한 준비 역시 중단되면서, 한·미 간 고위급 안보 대화와 방산 협력 논의가 한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정상회담과 장관급 회담은 방산 협력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서명식과 사진 한 장이 수십억·수백억달러 규모 패키지의 ‘정치적 보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당시 스케줄 조정을 단순한 외교 의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 추진 동력이 약해지는 신호로 받아들였다.다만 1년이 지난 현재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정권과 내각이 재정비되고, 외교·안보 라인이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멈춰 섰던 일정은 하나둘씩 재개되고 있다. 연기됐던 양자 국방장관 회담, 방산 실무 협의, 무기체계 설명회 등이 순차적으로 열리며 외교 채널은 점차 정상궤도로 복귀하는 모습이다.한 방산업계 관계자는 “예전처럼 ‘한국이 정치적으로 괜찮은 파트너냐’부터 묻던 분위기는 줄고, 다시 ‘어떤 체계를 언제 공급할 수 있느냐’는 본연의 질문으로 돌아오는 중”이라면서도 “다만 계엄 당시 드러난 정치·제도 리스크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것이 숙제”라고 말했다. -
- ▲ 수출형 잠수함. 자료사진 ⓒ한화오션
◆ KAI, 군 출신 CEO 조기 퇴진… 거버넌스 취약계엄 이후 새 정부 출범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나타났다. 공군 중장 출신인 강구영 전 사장은 2022년 말 KAI 수장에 올랐지만, 정권 교체 과정에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군 인사들의 모임인 ‘국민과 함께하는 국방포럼’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이력으로 취임 초기부터 ‘낙하산’ 논란이 제기됐다.강 전 사장의 퇴진 이후 KAI 대표이사 자리는 4개월 넘게 공석이 이어졌다. 항공·우주 플랫폼 기업 특성상 대표 공백은 주요 사업 전략 결정과 정부·군 협의, 해외 파트너 교섭 등에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적도 부진했다. KAI는 올 3분기 연결 기준 매출 7조210억원, 영업이익 6020억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2.6%, 21.1% 감소했다.그럼에도 KAI의 기술력과 성장 잠재력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견고하다. KAI는 지난 6월 필리핀과 약 9억7000억원 규모의 FA-50 추가 수출 계약을 체결했고, 최근 누리호 4차 발사에서 주탑재체인 차세대중형위성 3호를 독자 개발해 성공적으로 궤도에 안착시켰다.◆ 폴란드에서 드러난 경쟁 현실계엄 이후 1년 동안 수출 전선에서는 경쟁국의 움직임도 더욱 분주해졌다. 한국이 정치·외교 리스크 관리에 집중하는 사이, 미국·독일·프랑스·스웨덴 등 전통 방산 강국은 동유럽과 중동을 중심으로 자국 무기체계와 금융·정치 패키지를 앞세운 영업전을 강화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맞물려 세게 각국이 앞다퉈 방위 산업 보호에 나서며 시장이 크게 성장한 탓이다.특히 폴란드는 우리 기업들로부터 K2 전차, K9 자주포, FA-50 도입을 이어가면서도 추가 전력 증강에서는 다양한 공급국과의 협력을 병행하는 ‘다변화 전략’을 가속하는 모습이다. 폴란드 차세대 잠수함 사업 ‘오르카(Orka)’ 프로그램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이 사업은 3척 규모, 약 4조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로, 우리나라의 한화오션을 포함해 독일·이탈리아 등 여러 글로벌 조선·방산 기업이 경쟁에 참여했지만, 최종 사업자는 스웨덴 사브(Saab)의 A26급 잠수함으로 결정됐다.업계에서는 유럽 방산업체 간 전략적 연대와 NATO 안보 구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즉 유럽 내부의 ‘유럽산 우선 조달’ 관행, 기존 동맹 구조, 금융 지원 조건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다고 보면서도 한국의 정치·제도 리스크가 보이지 않는 변수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한국산 무기체계에 대한 가격, 납기 분야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기반으로 정치적 리스크도 서서히 회복 국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각 방산기업도 현지 생산·조인트벤처 설립·기술 이전 등 국가별 사정에 맞춘 맞춤형 전략으로 시장 접점을 넓히고 있다.한 업계 관계자는 "기술·가격·납기 경쟁력은 충분히 입증된 만큼, 이제는 정치·제도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K-방산의 새로운 경쟁력"이라며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예측 가능한 거버넌스와 안정적 협상 구조를 갖추는 것이 장기 성장의 관건"이라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