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정권 침해 진상 규명, 선관위 전면 쇄신" 요구"진보·보수 문제 아냐 … 민주주의 근간 흔들려"교수사회, 구심점 부재 속 관망 … 내주 분수령 될 듯'공정' 외치는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 기본원칙 답해야
  • ▲ 연세대 총학 비대위 시국선언.ⓒ뉴데일리DB
    ▲ 연세대 총학 비대위 시국선언.ⓒ뉴데일리DB
    6·10 민주항쟁 39주년을 맞은 지난 10일 서울대학교 등 전국 16개 대학교 총학생회가 3일 치러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빚어진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참정권 침해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에 나섰다. 학생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과 선거관리위원회의 전면 쇄신을 요구했다.

    이날 시국선언문 낭독에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건국대·경희대·서강대·서울시립대·성균관대·숭실대·한국외대·한양대·홍익대·숙명여대·전남대·전북대·부산대 등이 공동 참여했다.

    학생들은 “우리가 침묵하면 국민의 권리 침해는 단순한 실수, 행정착오가 된다”며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가 흔들렸다”고 성토했다.

    이들은 이번 사태가 진영 논리를 떠나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 문제라고 지적했다. 연세대 총학은 이날 “이것은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어느 후보에게 유리했느냐, 어느 정당에 불리했느냐를 따지려는 문제가 아니다”며 “국민의 권리, 헌법,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남을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한 언론보도에는 “역시 젊은 대학생이 희망이다” “학생들이 너무 대견하다. 응원한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 ▲ 대학가에 붙은 투표용지 부족사태 규탄 대자보.ⓒ뉴데일리DB
    ▲ 대학가에 붙은 투표용지 부족사태 규탄 대자보.ⓒ뉴데일리DB
    반면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지식인층인 대학 교수들은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대학별로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발 빠르게 이어졌던 모습과 온도차가 느껴진다. 당시 서울대는 총학생회가 비상계엄 해제 직후인 12월 4일 규탄 성명을 내자 교수회가 바로 다음 날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고려대는 4일 교수·연구자들이 먼저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학생 대표가 시국선언 기자회견 현장에서 연대 발언 형태로 동참을 선언했었다.

    일부 교수는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서울 지역 A대학교 한 교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 못한 수준의 선거관리위원회는 대대적인 혁신과 개혁이 필요하다”며 “선거철에 맞춰 휴직이 늘어난다는 것도, 투표용지를 50%만 인쇄한 것도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방 국립대인 B대학교 한 교수는 “일단 겉으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며 “진보 성향의 교수들은 발언을 자제하는 듯하고 보수 성향 교수들은 관망하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아마 보수 정부에서 이번 사태가 발생했다면 전국적인 소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리하면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이번 사태의 엄중함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들 목소리를 결집하기 위한 구심점이 부재한 상황이라는 얘기다.

    서울 지역 C대학교 한 교수는 “현재로선 당장 나서기보단 지켜보는 분위기가 더 강한 것 같다”며 “(누워서 침 뱉는 격이지만) 교수들이 비겁한 면이 있다”고 자조 섞인 말을 했다. 그는 “이재명 정부 들어 방관자나 소외자처럼 지켜보겠다는 교수들이 더 늘어난 것 같다”며 “동조자가 있고 그래야 의견이 규합될 텐데 지금은 분위기가 냉소적이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이는 이재명 정부 들어 자행된 정부·여당의 사법부 농락과 입법 전횡에도 시국선언 없이 침묵했던 진보 성향 교수들의 선택적 정의와 보수 정부에선 목소리를 내다가도 정권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은둔하는 보수 성향 교수들을 싸잡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 ▲ 건국대 총학 시국선언.ⓒ뉴데일리DB
    ▲ 건국대 총학 시국선언.ⓒ뉴데일리DB
    일각에선 다음 주가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는 분수령이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서울 지역 D대학교 한 관계자는 “교수님들이 특성상 잘 안 모일뿐더러 노력을 들여서 막 행동하지도 않더라”면서 “12·3 비상계엄 사태 때 시국선언을 보면 교수님들이 계속 다듬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더라. 다음 주쯤 되면 (교수들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겠나 싶다”고 예상했다.

    학내 교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는 한 지방대 교수는 “다들 관망하는 분위기인데, 내부적으로 이번 사태가 가만히 있을 일이냐며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이 있어 조만간 (공론화를 위한) 화두를 꺼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선 이번 사태에 유독 학생들이 시국선언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두고 ‘공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청년 세대의 문제의식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국가 기관인 선관위의 잘못으로 모든 유권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투표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는 불공정에 그동안 쌓였던 사회적 불만이 표출됐다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의 시국선언문에도 투영돼 있다. 성균관대 총학은 “두텁게 쌓아 올려진 민주주의 위에서 자라난 우리 세대는 공정을 중요한 가치로 새긴다”며 “청년들에게 1인1표라는 공정성이 훼손된 작금의 사태는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어쩌면 우리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파적 해석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본 원칙이 흔들렸을 때 기성세대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