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 지원·사회공헌 활동 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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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습니다"

지난 24일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 조찬 포럼 후 박병원 경총 회장에게 문성현 노사정위원장 선임에 대한 견해를 묻자 박 회장은 이처럼 답변 자체를 피했다.

이 사안뿐 아니라 통상임금 등 최근 굵직한 경제·경영 이슈에 대해 경총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철저히 입을 다물고 있다. 기업들 사이에서는 이들 경제단체가 현 정부 출범 이후 급격한 입지 위축과 함께 '재계 대변인' 역할을 포기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 '핫 이슈'에 침묵·톤 다운…"경제단체 맞나"

문재인 대통령은 앞서 23일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장에 민주노총 간부 출신의 문성현(65) 전 민주노동당 대표를 위촉했다.

'노동운동계의 대부'격 인물이 노사정을 조율하는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일반 대중 사이에서조차 '편향 시비'가 불거졌지만 정작 경제주체 중 다른 한 축인 기업이 모인 민간단체 경총과 전경련은 언론의 요청에도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특히 경총의 경우 노사정위원회에 현재 사용차 측의 위원으로 참여하는 '당사자'임에도 논평을 거부했다.

경총과 전경련은 '통상임금' 이슈에 대해서도 철저히 방관하고 있다.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1심 선고가 이달 말로 임박하자, 한국자동차산업협회·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 등 완성차·자동차부품업체 단체들이 거의 매일같이 성명과 간담회 등을 통해 통상임금 판결에 따른 인건비 증가 우려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규모가 더 큰 두 '형님' 경제단체는 침묵하고 있다.

두 단체가 통상임금의 재계 파장 관련 최신 분석이나 입장 등을 내놓지 않자, 언론들은 2013년 대법원의 통상임금 '신의성실 원칙' 첫 판결에 앞서 당시 경총 등이 내놓은 옛 보고서를 여전히 인용하고 있다.

심지어 기업 규모에 상관없이 재계 전반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두 단체의 목소리도 너무 작아 들리지 않을 정도다.

경총은 지난 2015, 2016년 최저임금 관련 모두 8건의 보도자료를 내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지만, 올해의 경우 '2018년 적용 최저임금 결정에 대한 경영계 입장' 한 건을 내놓는 데 그쳤다. 전경련의 대응도 비슷한 수준이다.

내년도 최저임금(시급) 인상 폭(16.4%)이 2001년(16.8%) 이래 최고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기업들 입장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대기업 관계자는 "통상임금 등의 사안은 결국 법리 싸움을 통해 판결이 나겠지만, 판결 전까지는 경제단체들이 재계 입장과 어려움을 최선을 다해 대변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경제단체의 존재 이유"라고 지적했다.

◇ '존립 위기' 전경련, '대통령에 혼난' 경총

한국의 두 대표 경제단체가 이처럼 지나치게 정부와 여론의 눈치를 보는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우선 전경련은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여론의 질타와 함께 지난해 말 215명이던 임직원 수는 현재 110명 정도로 40% 넘게 줄었고, 삼성·포스코·현대차·SK·LG 등 회원들이 잇따라 탈회하면서 몸집(회원사 수)도 600여 개에서 400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전경련은 이름을 '한국기업연합회'로 바꾸는 등 정관 변경을 통해 '부활'을 꾀하고 있지만, 아직 새 정관을 심의·의결할 이사회나 총회 일정조차 잡지 못한 형편이다.

더구나 재계에서는 산업부가 정관 변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동안 법인 설립 목적 외 사업으로 공익을 해쳤다'는 판단에 따라 아예 설립허가를 취소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경총은 지난 4, 5월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당시 "세금을 쏟아 부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임시방편적 처방에 불과하고, 당장은 효과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사회 각계의 정규직 전환 요구로 기업들이 매우 힘든 지경이다. 논란의 본질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라고 말하는 등 새 정부 일자리 정책에 잇따라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경총은 문 대통령으로부터 "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질책'에 가까운 지적을 받았다.

◇ 동계올림픽 등 재계 사회공헌·경제외교 사업도 얼어붙어

이들 경제단체의 위축은 '재계 대변인' 역할 뿐 아니라 여러 공익·외교 성격의 사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평창올림픽 지원 사업에서 전경련과 대기업의 역할이 눈에 띄게 줄었다. 기업 후원금 모금이 난항을 겪고 있고, 2016년 한·일 재계회의에서 평창-도쿄올림픽 협력을 제안하고 2014~2016년 잇따라 평창에서 기업인 하계포럼을 열며 평창올림픽 홍보·지원에 나섰던 전경련도 거의 손을 뗀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올림픽이 200일도 남지 않았지만, 예전보다 올림픽에 대한 경제계의 관심이나 후원이 적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을 삼성·현대차·SK·LG·포스코 등 5개 대기업에서 매년 총 20억 원을 받아온 동반성장위원회도 전경련 지원이 끊긴 뒤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마다 수천억 원에 달했던 대기업의 온누리상품권 구매액도 올해 급감했다.

지난 1월 17~18일 열린 스위스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에서 전경련이 2009년 이후 해마다 주관한 '한국의 밤(KOREA NIGHT)' 행사가 8년 만에 불발된 것도 전경련을 통한 대기업 활동 '마비'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전경련 관계자는 "전경련 자체 사업으로서 2009년 이후 전국에 101개 어린이집을 건립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도 펼쳤으나, 최순실 사태 이후 오해를 원천적으로 불식하기 위해 사회공헌 관련 부서와 사업 자체를 전면 폐지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