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가 쓴 '방송사의 동료 기자들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7년 한 해도 이제 딱 닷새 남았습니다. 한데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어찌 다스려야 하나요. 아무튼 한 해를 잘 견뎌 냈다는 대견함과 어느새 한 살 더 먹는다는 허전함이 속절없이 어깨동무하는 걸 말입니다.

    올 한 해 제가 썼던 칼럼들을 꺼내 읽어 봤습니다. 그러곤 김수환 추기경님을 떠올렸습니다. 85세의 추기경님은 자화상을 그린 뒤 그 옆에 ‘바보야’라고 쓰셨다죠. 이유를 묻자 “뭐 그리 잘나고 많이 안다고 (한평생) 나대고 살았나”라고 답했답니다. 마치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서 뜨끔합니다. 연말을 맞아 저 역시 사과드립니다. 그동안 제 글로 인해 맘 상하신 모든 분들께.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방송사의 선후배와 동료들에게 말입니다.

    그동안 볼펜(신문기자)과 마이크(방송기자)는 좋은 동료이고 친구였습니다. 물론 취재 현장에서는 서로 경쟁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서나 병원을 돌다 서로 마주치고, 발이 부르트게 시위 현장을 함께 쫓아다니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정치인 집 앞에서 죽치고, 함께 밥 먹고 술 마시고, 낄낄대며 자기 1진(회사 선배) 흉도 보고 그랬습니다. 장담컨대 군사정권 시절을 포함해 이 굴곡 가득 찬 한국 현대사를 겪으면서 언론이 저지른 과실과 흠에서 방송은 신문보다 결코 덜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방송은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됐습니다. 방송사들은 앞다퉈 신문을 단죄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초기의 어느 날 TV를 보고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방송사의 동료는 “일부 보수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며 신문사의 색깔 성토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자가 어떻게 기자 생활을 해 왔는지 아는 입장에서 솔직히 기가 막혔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눈을 감고 들으면, 보수 다음에 ‘반동’자만 집어넣으면 북한의 대남방송인 줄 알았을 겁니다.

    노무현과 386이 장악한 정부 아래서 방송은 국보법 폐지 여론 조성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사상의 자유를 외치면서 동시에 보수 신문은 다 꼴통이고 폐간해야 할 언론인 것처럼 몰아가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500만 표 이상의 엄청난 차이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19일 저녁, TV를 유심히 봤습니다.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이 당선자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어떤 방송사의 여자 앵커 모습은 차라리 안쓰러웠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방송사가 선두를 달리는 제1야당의 대선 후보를 유죄 판결이 난 피의자처럼 몰아붙였던 게 생각나서입니다. 과거에 그랬듯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면 방송사의 보도 태도도 180도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에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길하는 건 방송사 동료 기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문이 그동안 이렇게 당했고, 이제 정권이 바뀌었으니 너희 방송사들 한 번 당해 봐라”하는 보복심은 더더욱 아닙니다. 언론이 권력의 향배와 무관하다는 건 아마 거짓말일 겁니다. 언론사는 세속과 떨어진 종교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이런 웃기지도 않은 현상은 이제 중단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명박 당선자에게 바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당선자는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아마 TV에 서운한 게 많았을 겁니다. 언론이 최소한의 공정성마저 저버리면 그 당사자는 어떤 느낌을 받는지 충분히 경험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대통령이 되면 과거 정권들처럼 방송을 손에 틀어쥐려고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 당선자는 경제를 살린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싶을 겁니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 더 기대합니다. 언론이 제자리를 찾게 도와준 첫 대통령이란 평가도 함께 받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