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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이 전체 의석 480석 중 단독개헌선(320석)에 육박하는 308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둬 54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을 두고 민주당과 좌파진영이 술렁였다.
정세균 대표는 31일 당 지도부 회의에서 "30 여개월 뒤 한국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예감한다"고 주장했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무소속 정동영 의원은 하토야마 일본 민주당 대표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적절한 시점에 만나 한일간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민주당 지도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정세균 대표와 이강래 원내대표 ⓒ 뉴데일리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은 31일 한 좌파 인터넷매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일본 유권자들이 54년 자민당 장기집권을 심판했듯이 우리 국민들의 마음도 벌써 내년 지방자치제 선거와 2012년 총선과 대선에 가 있는지 모른다"며 "결국 현 정부와 한나라당 정권은 방송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다"며 일본 총선 결과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다.
오마이뉴스는 31일 '55년만의 日 정권교체가 주는 교훈' 제하 기사에서 "총선 결과는 근본적으로 전후 일본인들에게 역사상 가장 안온한 삶을 제공했었던 일본의 보수적인 사회 체계가 한계에 달했음을 의미하며, 짧게는 고이즈미 전 총리로부터 아소 다로 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자민당 내각이 소위 개혁(改革)이란 이름을 걸고 추진했던 일련의 정책들이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반개혁(反改革)적 효과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며 심판"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MB정권은 당장 급하지도 않은 4대강 유역 개발에 사활을 걸고 예산을 집중 배치하고 있는가하면 수도권 지하대로 건설 같은 황당한 토목 계획만 연일 발표되고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의 개혁 정책은 여러모로 고이즈미 정책과 흡사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상당수의 진보성향 학자들 및 시민운동가들은 '하토야마 정권' 하에서 북일관계가 개선되어 엄격한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해온 MB정부도 대북정책 기조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MB정부의 지지율이 30~40% 수준에 머물러있는 상황에서도 민주당의 지지율은 10~2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체할 정치적 리더십을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은 구민주당, 친노, 친정동영, 386 등으로 사분오열 상황에 놓여있으니 일본 민주당의 '성공 스토리'로부터 희망을 찾고 위안을 받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단순히 이름이 '민주당'으로 같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같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일본 자민당의 실패 원인이 (1) 책임정치와 동떨어진 '돌려막기식' 파벌주의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염증, (2) 국민복리가 아닌 조직논리와 관행을 앞세우는 관료들의 민생 외면과 무사안일에 대한 일본 전후세대의 분노 폭발 등의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토야마' 민주당이 일본 국민들로부터 선택을 받은 것에 대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번 일본 중의원 선거 결과 어디에서도 일본 국민들이 '안정적 보수' 노선을 버렸거나 '좌경화' 되었다는 징조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좌파 성향의 사민당과 공산당의 당세가 정체 혹은 위축으로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일본 국민들의 지향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 일본 국민들 다수는 '안정적 보수주의' 흐름 속에서 개혁을 주도할 세력으로 민주당을 지목하여 자민당으로부터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탄 측면이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 민주당과 한국 민주당은 그 뿌리부터가 다르다.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두 주역은 누가 뭐래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대표 대행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이번에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한 자민당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토야마는 지난 1955년 양대 보수정당이었던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자민당으로 출범할 당시 민주당을 이끌었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전 총리의 손자이며, 그 자신도 자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고 정치리더로 성장했다. 그리고 오자와는 1970년대와 80년대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을 이끌었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마지막 후계자로 지목되어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들이 좌파로 변신했다는 이야기도 금시초문이거니와 민주당이 보수정당에서 좌파정당으로 노선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청와대를 예방하여 이명박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 ⓒ 청와대 제공 2009년 일본 중의원 선거의 두 가지 키워드는 '생활 중심의 정치'와 '국민 눈높이에 맞는 개혁'이었다. 50 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정당 자민당의 적통이었던 인물과 좌파정당인 구 사회당과 사민당 인사들이 큰 갈등 없이 같은 정당 내에서 한솥밥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탈계층 및 탈이념이라는 큰 틀 속에서 '실용'이라는 코드로 이들이 뭉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와 오자와는 여전히 '안정적 보수'를 희구하는 일본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안전판으로 인식되었고, 좌파 사회운동가 출신의 간나오토(菅直人) 전 대표는 '변화와 개혁'이라는 아이콘을 일본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렇게 민주당은 조용하고도 깊숙히 민심 속으로 파고들며 54년만의 정치혁명을 이룩했다.
이번 선거에서 이념과 계층 갈등의 문제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당했다. 일부 자민당 인사들은 '하토야마' 민주당이 경제정책과 외교노선에 있어서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국정을 파탄으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나버렸다. 자민당은 패배가 굳어지는 상황으로 몰리자 막판에는 "자민당에게 견제 의석을 주지 않으면 민주당의 포퓰리즘적 독재가 현실화될 것"이라며 표를 호소했지만 이것 역시 일본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이번 일본 총선이 도리어 지난 2007년 한국 대선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실용주의'와 '일하는 정부'를 내세운 이명박 후보에 대해 당시 민주당은 '아마추어 정치'와 '포퓰리즘적 독재'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표를 호소했지만 민심의 반응은 차가웠다.
특히, 이번 자민당 참패의 최대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는 집권 당시에 여러 면모에 있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당내 비주류 출신 정치인으로 포퓰리즘적 인기를 등에 업고 무리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당의 결속력을 급격히 약화시켰고, 책임있는 후계자를 양성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아베-후쿠다-아소로 이어지는 단명 내각의 원인을 제공했고, 한국 및 중국과 영토 및 역사 문제로 빈번히 충돌함으로써 일본 외교의 역량을 위축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08년 집권한 미국 '오바마' 민주당 정부와 2009년 집권에 성공한 일본 '하토야마' 민주당 정부의 공통점이라면 이들 모두가 '실용주의'와 '눈높이 개혁'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집권 키워드는 이처럼 따로 있는데 거기에 자꾸 대북문제와 좌파정책을 갖다붙이니 번번히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오바마가 집권하면 마치 당장이라도 북미 양자대화가 시작되어 북미수교와 북핵문제가 눈녹듯이 풀릴 것으로 기대했던 좌파세력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대북 압박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집단적 패닉에 빠진 바 있다. 그런 그들이 또다시 '하토야마' 정권 출범을 앞두고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9개월의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집단적 망각과 최면도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번 일본 총선 결과는 한국의 민주당에게 중요한 교훈과 과제를 던지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광우병파동 때 활활 타올랐던 촛불이 왜 용산사고와 미디어법 통과 당시에는 타오르지 않았는지 민주당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에 머물고 있었던 상황에서도 왜 민주당의 지지율이 단 한번도 30%대에 진입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해답을 못찾고 있다.
그 해답을 풀려면 민주당은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국민 속으로 들어간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겉으로는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단순히 선동의 대상으로만 국민을 여겼던 김대중과 노무현의 패러다임에서 이제라도 벗어나야만 한다. 그 가운데 '실용주의 정책'과 '눈높이 개혁'을 놓고 한나라당과 당당하게 경쟁해서 이기는 쪽으로 당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0개월 후의 민주당은 일본 정치사상 전무후무한 압승을 통해 정권교체에 성공한 '하토야마' 민주당이 아닌 집권 이후 극심한 정체성 혼란과 당내 이념갈등으로 참담하게 간판을 내린 '무라야마' 사회당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