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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증권가에서 주식과 채권, 펀드, 선물 등 각종 금융투자상품 거래로 한해 2경(京)원 이상의 돈이 돌고 있다.
이는 2010년 국내총생산(GDP) 1천172조8천34억원의 19배가 넘는 액수다. 국내 경제관련 통계에서 조(兆) 다음 단위인 `경'이라는 수치가 확인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주식 거래 등이 국민 경제생활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졌다는 의미다. 자본시장이 급팽창하면서 기업의 자금 조달이 쉬워지고 투자자들이 수익을 얻을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도박판으로 변질한 일부 파생상품 등을 통해 대박을 꿈꾸는 `한탕주의' 풍조가 만연한 것은 금융자본주의의 그림자로 지적된다.
◇ 여의도에 `돈 구름' 형성…연간 2京
17일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0회계연도(2010.4~2011.3) 증권사를 통해 이뤄진 금융투자상품 위탁매매 거래대금이 2경2천378조원이었다. 증권사들이 받은 수수료만 5조3천618억원이었다.
일반인에게 친숙한 주식은 거래대금이 3천875조원에 달했다. 채권은 4천130조원, 펀드는 94조원이었다.
증권사 전ㆍ현직 대표 12명이 최근 기소되면서 널리 알려진 주식워런트증권(ELW)과 파생결합증권(ELSㆍDLS) 거래액은 434조원이었다. 올해 우리나라 국방예산의 14배 수준이다.
파생상품인 선물은 거래액이 1경2천964조원으로 전체 거래액의 57.9%를 차지했다. 옵션과 선도는 각각 772조원, 14조원이었다.
작년도 금융투자상품 전체 거래액은 연간 GDP의 19.1배에 달하는 액수다.
올해 6월 기준으로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서 거래된 삼성전자, 현대차 등 1천813개 회사의 주식 시가총액(1천303조40억원)의 17.2배 수준이다.
우리나라 금융투자 거래액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은 1998년도만 해도 4천503조원에 불과했다. 12년만에 무려 5배나 급증한 셈이다.
2000년도에 1경원을 넘었고 다시 7년 만인 2007년도에는 2경원을 돌파했다. `환란의 덫'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거침없이 고속질주한 셈이다.
특히 2007년도에는 전년 1경4천조원에서 대도약을 했다. 전인미답의 2경원 고지에 올라선 것이다. 그해에 주식시장이 초호황을 누린 덕분이었다.
코스피는 2006년 12월 1,434.46에서 2007년 10월 2,064.85까지 치솟았고 2008년 상반기 내내 1,600~1,800선을 유지했다.
증권거래법 등 6개 법률을 통합한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이 공포된 2007년 8월 이전에 중소형 증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경쟁이 치열해진 것도 금융시장 급팽창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2007년 11월 미래에셋이 글로벌 증시에 투자하는 펀드를 출시하고서 한 달 만에 무려 4조원이 몰린 것은 당시 자본시장 투자 열기를 읽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2009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금융투자가 위축돼 거래액이 1경8천397조원으로 잠시 줄었으나 곧바로 회복돼 2010년도에 2경 고지를 재탈환했다.
◇ 금융투자 열풍에 `한탕주의' 만연
국내 자본시장이 통합 자본시장법 발효를 계기로 급성장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주식ㆍ펀드 열풍이 불었다. 대부분 가정에서 1~2명은 주식ㆍ펀드 계좌를 만들 정도였다.
주식투자 인구만 봐도 2000년 330만4천명에서 2006년 361만3천명으로 증가했다. 2007년에는 444만1천명으로 급증했다. 작년엔 다시 478만7천명으로 늘어났다.
작년 주식투자자는 전체 인구의 9.79%, 경제 활동인구의 19.51%에 달한다.
주식투자 인구가 늘어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시가총액은 2000년 217조원에서 작년 1천240조원으로 커졌다. 무려 5.7배 팽창한 것이다.
이달 14일 기준으로는 1천303조원이다. 작년 국내 GDP 규모를 추월했다. 2000년도만 해도 국내 GDP는 603조원으로 당시 주식 시가총액의 2.8배였다.
자본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의 자금조달이 쉬워졌고, 그 결과 국가 경제가 성장하는 효과를 거뒀다. 은행 중심의 금융구조가 다양해지는 성과도 있었다.
투자자들이 은행 예금 이자나 보험료 수익보다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금융시장이 커졌다는 의미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증권시장이 성장하면서 기업의 자금조달이 더욱 원활해지고 투자자 수익이 커지는 선순환 구조가 전반적으로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증권사 등 금융기관들이 판을 깔아놓은 `투전판'에 뛰어들었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빈번하고 이 때문에 반사회적 범죄가 증가한 것은 화려한 금융시장 이면의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난 5월 선물투자에 실패한 40대 남성이 옵션 만기일에 맞춰 주가 폭락을 노리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서울역에 사제폭탄을 설치했다가 검거된 사건은 그런 자화상의 일면이다.
투전판으로 변질한 주식이나 파생상품에 손댔다가 쪽박을 차고 노숙자가 되거나 목숨을 끊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원금 손실을 본 투자자들이 자주 항의전화를 하는데 그때마다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끊기면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자본시장이 동북아시아 금융허브로 발전하려면 이제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투자자 보호에 더욱 힘써 각종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