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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이승만포럼>
2012. 7. 12(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김재창(예비역 육군대장,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
1. 문제의 제기: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0년 6월 중순,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불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하고 있던, 반공포로를 모두 석방하라고 지시한다. 6월 18일 밤 수용소의 문이 열리자, 반공포로 대부분이 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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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포로 교환문제는 정말 뜨거운 감자였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원래 소속되었던 나라로 송환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6·25 한국전에서의 반공포로는 이런 국제규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북괴군이 불법남침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길에 다니는 젊은이는 보이는 대로 잡아다가, 괴뢰군의 군복을 입혀 소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보내었고, 이들이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경우, 아무도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대부분 반공포로가 된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 입대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가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UN군 사령부에서는, 포로의 송환은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공산군 측 주장은 반공포로도 모두 북한으로 돌려 보내야한다는 주장이어서, 이 문제를 놓고 쌍방은 근 2년 동안 줄다리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1953년 봄부터, 교전 쌍방은 간신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중립국 책임 하에 포로의 자유의사를 확인한다는 절충안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그때에 교전 쌍방은 정말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넘어서 어렵게-어렵게, 일단 교전을 중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무렵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던 쌍방은 모두 지칠 만큼 지쳐있었다. 북괴군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주력을 거의 다 잃어버린 상태였고, 중공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공급해야했던 소련의 경우도,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Stalin 이 죽은 다음 소련의 새로운 권력구조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하는데 대한 내부적 부담이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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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의 주력을 제공하고 있었던 미국은 군사비를 대폭 증강하여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응하기위한 전비 태세를 보강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한반도에 주력을 묶어두는 것을, 세계전략 차원에서, 몹시 부담스러워했고, 전쟁이 길어지자 미국 내부에서도 부분적으로 염전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여,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통령은 한국전을 조기에 종결 짖겠다는 정책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해둔 상태였다.
영국의 경우 미국의 우방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Hong Kong 문제를 위시하여 중공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할 때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자국의 안보에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에 대하여 빨리 전쟁을 끝내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강대국들이, 겨우 만들어 놓은 합의에 찬물을 쏟아 부으면서, 정전회담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모택동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한국군에게 보복하라고 팽덕회, 전선 사령원에게 지시하였고, 영국의 처칠은 이승만정부를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항의 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터져 나오는 불만을 참고 삭이면서, 위기관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
당시 한국정부의 입장은 기왕에 전쟁이 일어나서 이미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고,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 기회에 분단의 문제를 종결지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참가하고 있던 강대국들의 견해는 달랐다.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김일성의 괴뢰군이 낙동강까지 내려갔다. 그 다음 UN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청천강까지 올라갔다. 뒤늦게 참전한 중공군이 다시 한강을 건너서 평택선까지 남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얻어내지는 못하였다.이 전쟁은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여 남의 나라의 전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편이 얼마만큼 전투력을 파견하느냐에 따라, 힘의 균형에 변화가 일어났고, 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했을 뿐, 남북한 당사자를 제외하면, 이 전쟁에서, 자기 나라의 존망(存亡)을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그래서 이 전쟁이 모두에게, 사생지지(死生之地)가 되기는 했지만, 여느 전쟁처럼 존망지도(存亡之道)가 될 수는 없었고, 오히려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요,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라는 “전쟁과 정치를 동일시” 하는 논리가 더 설득력을 지니게 된 국제 분쟁이 된 것이다.
미국정부는 대통령 특사 Robertson을 파견하여 이승만 정부와 긴 협상을 시작하였다.
이대통령께서 단독북진이라도 하겠다고 주장했던 것은 가능하면 이 기회에 분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민족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분단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분단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그것은 곧 Arms or(and) Alliance의 문제였다.
한·미 양국 정부는 정전후의 안전을 보장하기위해, 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문제와 한미 상호 방위조약체결을 약속한 후 이대통령은 그렇게 극렬하게 정전을 반대하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UN 참전국들은 서둘러 정전 협정을 마무리 한 후, 7월 27일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그날 자정이 되자, 전선에는 총성이 멎었다. 격전의 3년이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일단 정전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 정전 체제가 거의 60년을 이어오고 있다.오늘 우리는, 1953년 그때, 즉 60 년 전 문제를 다시 들추어내어 그 뿌리를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이 대통령께서 모험을 해가면서 그렇게 격렬하게 정전을 반대했던 배경에는, 이 나라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문제에 심각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의 고뇌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그 속에 오늘 우리나라 안보의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문제들이 모두 다 담겨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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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Buffer 의 나라
일반적으로 강대국사이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를, 국제정치학자들은, Buffer라고 부른다. 완충지대의 나라라는 뜻이다. 19세기말 과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입지가 영락없이 그런 Buffer의 나라였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이 Buffer의 나라를 다루었던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독립을 보장해 주면서, 중립국으로 관리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적절한 선으로 나누어 분할 통제하는 방법이고, 세 번째 방법은 강대국끼리 싸워서 이긴 나라가 독차지하는 방법이다. 결국 Buffer의 입장에서는, 주변 강대국들 간의 거래에 따라,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그 나라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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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승만 대통령이 겪은 Buffer의 운명
사실 우리는 이 세 가지 운명을 다 겪어본 나라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중국이, 노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싸웠던 전쟁이었다. 이들이 모두 한반도를 Buffer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지정학적 특징들이 20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왔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태동하고 있던 1950년대, 그때에도 한반도는 역시 Buffer 의 나라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이대통령의 첫 번째 고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53년 8월 9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서명을 한 후 이 대통령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이 나라가 겪어왔던 Buffer의 운명에 대한 그의 견해가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신이 1875년 3월 26일이었으니,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그는 20세의 청년이었고, 노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30세,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종결되었던 1945년에 그는 70세의 노인이었다.
일본, 소련(구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이다.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주변 강대국들이 서로 먹으려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를 살아오면서,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에서, 힘의 논리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그리고 Buffer의 나라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를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고, 또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 내용 중에 중요한 부분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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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일본: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강화조약(하관조약) 제 1항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에 조공 헌상 전례는 영원히 패기 한다.” 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놓고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긴 후 내 걸었던 명분이,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 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가소롭게도, 그것은 마치 청나라의 압제를 받던 조선을 일본이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1910년, 일본은 이 “완전한 독립국”이라던 조선을 송두리째 삼켜 버렸다. 강대국들이 Buffer를 다루는 전형적인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이 대통령께서는 그런 일본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 집단과 전쟁을 하면서도, “반공”과 동시에 “반일”을 국시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전략 차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양면작전이다. 물론 당시 일본은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김일성 집단과 싸우면서, 남쪽으로는 “반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와 그 전략의 배경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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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소련:
독일의 패망이 확실시되고 있던 1945년 봄, Roosevelt는 Stalin에게, 독일이 항복하는 대로, 태평양전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되도록 피를 덜 흘리면서 최대한 빨리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talin이 이 제의를 수락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1905년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극동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모든 이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Stalin이 보장해 달라는 이권에는, 주로 만주철도와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여순, 대련항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남부 사할린섬을 포함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그때 이미 만주에 들어와서 기지를 구축하고 있던 러시아와 한반도를 장악한 후 만주로 진출하려던 일본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에 대하여 한반도의 39도선 북쪽에 완충지대를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일본은 압록강 북쪽 만주 땅에 완충지대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외교적 마찰로 협상이 결렬되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극동에서 물러났다. Stalin의 속셈은 정확히 그 원한을 풀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에 Stalin이 명시하지 않은 중요한 속셈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러시아가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한반도에서의 이권이다. 1905년 당시 러시아의 외교관들이 39도선 이남은 일본의 영역이라고 인정했지만, 이제 일본이 망하는 마당에 Stalin은 한반도 전체를 내다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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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가 분단된 배경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45년 8월 6일 첫 번째 핵폭탄이 일본에 떨어지자, Stalin은 급히 군대를 동원하여 태평양 전역(戰域)에 투입하였다. 그는 주력을 만주에 투입하면서,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별도로 다른 부대를 한반도로 진출하게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본토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와 한반도에 배치된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미약하였다. 따라서 소련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하할 수 있었다.
당황한 미국 정부가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군사작전 구역을 나누자고 제의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Stalin은 그 제의를 즉각 수용한다. 당시 그에게 38도선은 1904년에 러시아가 일본에 제의했던 39도선보다, 훨씬 남쪽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 최근 영국학자들에 의해서 공개되고 있다. 당시 Stalin이 일본영토였던 대마도를 한국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입장으로는, 일본이 36년 동안이나 이 땅을 식민지로 통제하면서, (3·1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것처럼), “아 문화민족을 토매인우”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것도 뺏어 오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Stalin이 나서서 대마도를 뺏어주겠다고 주장했으니, 얼른 듣기에는 자비로운 해방군이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보면, Stalin의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의 판단으로는 일본이 물러간 후 어차피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통제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대마도는 일본을 위협하는 전진 기지로 유용하게 쓰게 될 것 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라 하지만, 소름끼치는 대목이다. 강대국들이 Buffer를 다루는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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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lin이 Roosevelt에게 요구했던 조건 중에, 외몽고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때에 외몽고는 중국이 통제하고 있던 땅이었다. 그런데 Stalin이 외몽고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얼른 듣기에는 몽고인들의 염원을 들어준 구세주 같은 주장이지만, 사실은 그 땅을 중국에서 때어내어 소련이 갖겠다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Stalin이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몽고를 독립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대마도를 일본으로부터 뺏어서 조선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꼭 같이 해방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야수의 모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6·25 한국 전쟁은, 1905년 이전에 구 러시아가 차지했던 이권을 회복하려고 극동에 나타난 Stalin이, 욕심을 내어 한반도 전체를 먹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다. 패전 일본은 쫓겨 갔고, 미국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철수하였고, 신생 대한민국은 아직도 Buffer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국제사회는 무정부 상태다. 따라서 1953년 그런 상황에서 정전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고 참전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외형적으로는 이 Buffer의 나라를 반으로 나누어 통제하는 형태가 되지만, Buffer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똑같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운명을 안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는 고통이 엄청나게 아팠겠지만, 그런 형태의 정전을 받아들여야하는 대통령의 입장은 더 고통스러웠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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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중국:
해석에 따라서는 입맛이 씁쓸해지는 사건이 하나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전후 질서를 협의하기위해 Cairo에서 연합국지도자들이 회동하였다. Roosevelt, Churchill, 그리고 장개석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이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반도의 독립을 즉각 선언하자고 제의한다. 얼른 보면 우리를 위해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다시 보면, 그것은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중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옛날 질서를 회복하려는 중국의 속셈이 짙게 깔려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Stalin이, 구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배하고 쫓겨 갔던, 1905년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주장이나, 장개석이 역시 일본에게 지고 물러갔던, 1895년 청일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모두 일본이 사라진 무대에서 한반도라는 Buffer를 놓고, 새로운 경쟁을 하겠다는 강대국들의 야심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는 대목이다.
사실은 한국전에서 정전협상을 하고 있던 1953년 우리의 안보환경은, 그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상황이 되어있었다. 장개석 대신 모택동이 중국을 통제하게 되었고 중소동맹이 채결되었고, Stalin의 팽창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생존전략을 찾아야할 입장이었다. 교과서적으로 그것은 Arms or Alliance의 문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그것은 Arms and Alliance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방향이 “한미동맹”이다.
Buffer의 운명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외(域外)세력과 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도대체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웃나라 중에서는 누구와도 믿을만한 동맹의 대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구한말 고종이 겪었던 고뇌와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법 역시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3.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조건:
어떤 경우에 전쟁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모든 학자들이 받아들일만한 권위 있는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지만, 같은 전쟁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해답을 찾아내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을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 전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사를 공부해 보면, 전쟁을 시작한 쪽이 이긴 경우보다 오히려 진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결국 많은 경우 판단의 착오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San Diago 대학 교수 John G. Stoessinger가 20세기에 일어났던 주요전쟁들을 분석하고 얻은 결론을 보면, 대부분의 전쟁이 지도자의 오판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Misperception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뜻이다.
1950년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 그의 판단은 일 개월 정도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Stalin도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떤 조건이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1950년, 그들이 오판했던 그때의 전략 환경을 그대로 남겨둔다면,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정전 협정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대통령께서 가장 깊이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이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이대통령의 고민을 깊이 이해하려면,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과정을 하나씩 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1950년, Stalin과 김일성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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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정권은 처음부터 대한민국과 전쟁을 하기위해 태어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이 정말 전쟁을 시작하고 싶었던 때는 1949년 봄(4월)이었다. 그때에 중국 대륙에서는 모택동의 군대가 만주를 석권하고 그 기세를 몰아 북경을 함락하고 양자강을 건너고 있던 때였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Stalin에게 전쟁을 시작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때를 놓치면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다그치던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모택동이 양자강을 건널 수 있다면, 그도 한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Stalin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전략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사실 초조한 마음에 Stalin을 설득해 보려고 갖은 수를 다 써 보았다. 그중 하나가, 소위 김일성의 제한 전쟁론이다. 38선의 서쪽 옹진반도에 국군이 고립된 채 배치되어있으니 소규모 부대를 동원하여 그 부대를 공격하면, 국군은 대규모로 반격을 해 올 것이고, 그 기회를 이용하면 전쟁을 시작한 책임을 이승만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회피하면서,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국군을 격멸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김일성이 그런 구상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Stalin이 역정을 내면서, 주 북한 소련대사에게 경고장을 보낸다. 그리고 김일성이 경거망동 하지 않게 하라고 엄명을 내린다.
분명한 것은 1949년 봄의 상황에서, Stalin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해 1950년 3월, Stalin이 다시 김일성을 만났을 때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이미 전쟁을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일 년 사이에 무엇이 Stalin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1949 년 한 해 동안, 동북아 지역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전략적으로 변화가 있었다. 첫째, 49년 8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했던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이다. 둘째, 모택동이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서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셋째, 50년 1월 미국 정부가 극동에서의 방어선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와 대만이 방어선 밖에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변화를 보면서, Stalin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해도, 된다는 판단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전쟁에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판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Truman이 군사적 개입을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Stalin은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결심하는 과정을 보면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Stalin이 한국전을 결심한 것도 나름대로는 여러 가지 상황을 다 검토한 후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Stalin으로 하여금 전쟁을 결심할 수 있게 했던 결정적인 요건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미국이 극동에서의 방어선을 발표하고, 한국과 대만이 방어선 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49년 Stalin이 전쟁을 반대했던 이유는 미군이 한반도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고, 1950년 Stalin이 전쟁을 결심하면서, 거듭 확인했던 내용은 미국은 이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단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을만한 징후, 사실 그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입장에서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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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보적 양자관계와 다자관계
UN은 집단 안보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침략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누구든지 남의 나라를 침략하면 모든 나라의 적이 된다는 약속으로부터 출발한다. 논리적으로는 모든 나라들이 이 약속을 지켜서, 하나의 침략자를 상대로 모든 나라가 힘을 합하여 응징한다면, 침략전쟁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다만 그것은 모든 나라들이 그 약속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논리다. 그러나 어떤 나라가 이웃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곤경에 빠졌을 때에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든 나라들이 참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다자간의 약속이, 논리적으로는 강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믿을만한 어느 한 나라와 동맹을 맺어둔, 양자 간의 관계보다 실효성이 없을 때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1949년의 한반도 상황과 1950년의 상황의 차이는,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제관계가 양자 간의 관계인가 아니면 다자 간의 관계인가 하는 문제였다. 1949 봄에 Stalin으로 하여금 전쟁을 자제하게 만들었던 전략 환경은, 비록 끝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한·미 간에 유지되고 있었던 양자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50 년 1월에 발표된, Achison line은 한반도의 안전보장이 미국과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UN이 담보하는 다자 간의 관계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Stalin은 이 다자 간의 관계가 보장하는 효과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곧 남한이 공격을 받을 경우 이를 구하기 위해 일어설 나라가 거의 없다고 본 것이다. 김일성은 한수 더 떠서, 설사 미군이 개입하고 싶어 하더라도,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서슴없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했던 1950년 6월, UN 안전보장 이사회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모든 회원국이 개입할 것을 결의한 것은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대통령의 고민은 나라의 안전을 이런 기적 같은 행운에 의존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적이 오판하기에 충분한 그런 여건 하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통령께서는 한미동맹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미·일 동맹 수준의 양자관계를 만들어 두어야한다는 생각이었다. 1950년과 같은 다자 간의 관계 하에 남북한이 대치하는, 그런 정전체제를 수용한다면, 중국이나 소련이 다시 개입하는 제2의 6·25 전쟁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단독북진이라도 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전형적인 Buffer의 나라; 주변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흥정을 해서, 자비를 베푼다면, 중립국으로 보존할 수도 있고, 욕심이 나면, 반으로 나누어 통제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들끼리 싸워서 이긴 자가 아예 다 먹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여건의 나라; 이제 이런 운명을 짊어지고 살수는 없다는 것이 이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대통령의 견해를 설명해주는 자료를 우리는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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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 대통령께서는 미국정부가 제의한 “대제재선언(the greater sanctions declaration)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그 내용은 정전 후 공산군이 다시 침략한다면, 16개 UN 참전국 명의로 대규모 제재를 하겠다는 선언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정부의 견해는 그 선언이 결국 전쟁을 억제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 제의를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런 다자 간의 약속이 한반도의 안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둘째, 미국 정부의 자세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대통령께서는,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린 것이다. 이 조치는 정전을 기다리던 참전국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된 사건이었다. 밤중에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에게 UN군 사령부로부터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사건을 일으켰냐는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백 장군이 그 밤중에 경무대로 대통령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때 대통령께서 했던 대답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했다고 그래” 누가 묻든지,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든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자세였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기자회견을 하시겠다고 말씀했다.반공 포로의 석방은 미국을 위시하여 참전국 모두의 뜻에 반하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미국이 대책 없이 전쟁을 정전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반대한 것이다.
참으로 인상적인 것은 그의 leadership이다. 상황이 어렵고 위험할수록, 대통령이 자기의 정치생명 다 걸어놓고, 스스로 책임을 짊어지고 나갔던 그의 leadership이었다.내용을 파악하려고 야단법석을 하고 있던 관계 기관, 언론, 그리고 외교관들이 모두 조용해 졌다. “내가 했다고 그래” 그 한마디 속에 대통령은 이 문제를 민족의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다는 무게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5. 한미동맹과 미국 극동정책의 변화:
당시 미국의 정책은 명예롭게 전쟁을 종결하는 것이었다. 6·25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정책은 Stalin의 팽창전략을 일단 거부한 것이었지, 극동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한반도 중간으로 끌어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이 UN의 이름으로 집단안보의 개념에 따라 침략자를 격퇴하는 군사행동에 동참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극동 지역에서의 정책을 변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국정부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이런 입장의 미국을 설득하여 한미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그 과정은 사실 한편의 Drama였다. 그것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정연한 논리와 오랜 우정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위협적인 결단을 엮어서 만들어낸 이승만 박사만이 할 수 있었던 위대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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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Eisenhower 대통령의 특사 Robertson을 설득하는 과정은 신뢰와 배신(Trust and Betrayal)의 논리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미국인들은 배신이라는 행위를 특별히 싫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대통령께서는 Robertson을 앞에 놓고, “우리는 미국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미국이 우리를 두 번씩이나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1945년 한반도가 분단되는 운명에 처했을 때였다는 것이다. 지금 한 번 더 배신하면 그것은 한국민들에게 미국의 신뢰에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는 논리였다.Robertson 특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 중에는, “이승만은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national suicide)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인물” 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미국이 정책을 바꾸어 이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주던지, 아니면 한 나라가 자살로 뛰어드는 광경을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국은 극동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판단에 도달한다. 그리고 한미동맹을 채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이 대통령께서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초안을, 조목-조목 검토하고 나서, 비로소 정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고, 이어서 미국은 교전국을 상대로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과거 Bush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 장관을 했던 Armitage가 했던 말이 이런 변화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 미국은 한반도를 미국 외교의 도구(Tool)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다.”
사명감에 가득 찬 그리고 유능한 지도자 한사람이 도구(Tool)를 동맹(Alliance) 으로 만든 것이다. -
6. 한미상호 방위조약:
한미 상호방위조약(The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은 전문과 6개 조로 구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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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에 명시된 동맹의 수준은, 첫째 한국과 미국이 태평양 지역에서 동맹국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든 나라들, 특히 잠재적 침략자들이 알게 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 동맹이 철저히 방어 동맹이라는 점을 명시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이 지역 내에서 더 이상 고립된 Buffer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었다는 것이다.
제2조와 제3조는, 태평양 지역에서 동맹의 어느 한 나라가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을 경우 그것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하고 언제든지 즉각 협의한다고 약속해 둔 것이다.
이상의 두 조항의 내용만으로는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이 즉각 개입한다는 약속은 유보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4조에 주한미군에 관한 사항을 명시해 둠으로써 유사시 사실상 즉각 개입이 이루어지도록 장치를 해두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Article iv: The Republic of Korea grants, and the United States accepts, the right to dispose United States land, air and sea forces in and about the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Korea as determined by mutual agreement.
마지막으로 제6조는 이 조약이 무기한 유효하다고 선언해 둔 것이다.
이 조약의 일차적 의미는, 태평양지역에서, 한국과 미국이, 어느 한 나라가 외부로부터 무력으로 위협을 받거나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한 나라는 그것이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약속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약속을 군사적으로 보장하기위하여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하게 해 두었다는 것이다.
동맹국의 군대가 한 지역에서 작전을 하게 될 경우 중요한 것은 지휘의 통일이다. Napoleon이 말했던 것처럼, 여러 명의 잘난 지휘관들이 지휘하는 부대보다, 차라리 좀 모자라더라도, 한 사람의 지휘관이 지휘하는 부대가 훨씬 더 잘 싸운다는 것이 전쟁을 경험해 본 사람들의 교훈이다. 한미 양국 군대가 한반도에 같이 주둔할 경우 누군가 한사람의 지휘관이 지휘해야한다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문제는 누가 지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미 양국은 이 문제를 합의 의사록을 통해 정리해 두었다. “대한민국은 UN군 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한, 그 군대를 UN 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하에 둔다고 합의한 것이다.
두 나라 이상의 군대가 같이 작전을 할 경우 지휘통일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가장 많은 전투력을 파견한 나라의 군 사령부가 모든 지휘 참모 활동을 담당하는 방법이다. 2차 대전 때에 Eisenhower사령부가 Normandy 상륙작전이라는 대규모 연합작전을 지휘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6·25 한국전쟁에서도 같은 방법이 적용되었다. 둘째 방법은 역시 주력을 파견한 국가(군대)의 지휘관이 지휘하지만, 참가하는 나라로부터 연락 참모단을 구성하여 지휘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방법이다. 한때 한미 기획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UN군 사령부과 한국군간의 연락임무를 수행했던 것이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처음부터 양국 또는 다국적 군으로 편성된 연합 지휘부를 구성하여 연합작전을 수행하는 방법이다. NATO나 최근 한미 연합군 사령부가 전형적인 예이다.
사실 떠나려는 미군을 붙들어 두면서, 한국군의 작전통제를 받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이런 경우 전투력의 주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군이 작전통제를 맡아야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군사작전 차원을 넘어서,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UN군 사령부에 이양한다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한국 정부가 정전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넘어서 그 개념을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참전국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둘째 이 대통령께서 단독으로 북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당시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한다는 것은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남북 분단의 문제를 그때에 해결해야한다는 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고, 또 한미 간 협상의 지렛대의 역할을 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제관계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제 통일의 문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추진해야한다는 명제가 굳어졌고, 또 그것은 장기적인 과제가 되었다는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주한 미군의 존재가 실질적으로 Double Check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남침은 군사력으로 억제하고, 한국군의 단독 북진은 통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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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
우리는 여기서 1973년 월남전에서 교전을 중단하기 위해 협상을 했던 것과, 그보다 20년 전, 1953년 한국전에서 정전회담을 했던 경험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월남의 경우에는 평화협정(Peace Accords)이라는 이름으로 쌍방이 서명하였고, 한국전에서는 정전협정(Armistice Agreements)으로 다루어진 것을 눈여겨 볼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협정이 이루어지면, 전쟁에 참전했던 외국군이 철수하게 되고, 힘의 균형에 변화가 일어나면, 다시 분쟁이 일어날 것이 뻔한 것이었는데, 월남의 티유 대통령은 이 협정을 수용하였고, 이 대통령께서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면서, 다만 반대하지 않는 선까지 양보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티유 대통령은 Nixon의 약속을 받아들여 유사시 미군이 개입할 것을 기대하였고, 이 대통령께서는, 실질적으로 국군의 전투력을 증강하고, 그리고 공식적으로 한미동맹을 체결한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안보란 냉혹한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이 점에서 철저했던 이대통령의 정치적 Realism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파리 평화조약이 서명 된지 2년 후 월남은 패망하였고, 한국전의 정전체제는 60년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두 가지 경우 내부적으로 그리고 외부적 전략 환경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반도의 상황이 월남반도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티우의 Leadership과 이승만의 Leadership의 차이가 그렇게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미동맹을 합의하기 위해 내한했던 Dulles 국무장관은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고 표현하면서 혈맹이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이 대통령께서는 한미 양국의 공동 노력은 외부 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의 안보를 오랫동안 보장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외침을 받아온 Buffer의 신세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동맹이 60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동맹과 관련하여 한미 간에 크고 작은 일들이 이어져 왔지만, 한미동맹이 성공적으로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여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였고, 한반도의 안전이 이어짐에 따라 동북아의 안정이 유지되어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미동맹이 결국 지난 60년간의 지역 안정을 유지해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 안정이 국내적으로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해 주었고, 이 안정이 지역적으로는, 중국으로 하여금 개혁과 개방을 가능하게 하여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미동맹은 한국전을 조기에 종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던, 지역 내에서 Buffer로 살아온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고, 더 나아가 동북아 전체의 안정을 보장하여 동북아 질서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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