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 이미 사실상의 정부가 세워졌으니 . . .
       
       북한에는 이미 1946년 2월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가 들어섰다.
    그리고는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유산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그와 같은 혁명적인 변혁은 정부 아니면 추진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그처럼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를 세우고도, 소련군은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다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는 이중성을 보였던 것이다. 

  •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소련은 북한에 1946년 2월 이미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다. 앞줄 가운데가 소련이 데려온 김일성. 친일파가 다수 참여했다.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소련은 북한에 1946년 2월 이미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다. 앞줄 가운데가 소련이 데려온 김일성. 친일파가 다수 참여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우익 세력들은 새로운 발상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1946년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었다.
       그리고는 미국과 소련의 개입이 없는 한국인 스스로의 자율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한지역에서만 수립되는 단독정부이어도 좋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그런데도 감히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지도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좌익들이 잡고 있는 언론계와 지식인 사회로부터 분단 책동자로 공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금기를 대담하게 깨뜨린 인물이 이승만이었다.
    그는 호남지방 순방 도중인 1946년 6월 3일 그 유명한 ‘정읍 발언’에서 남한 과도정부의 가능성을 비첬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사실상의 정부가 들어선 데다가 미-소 공동위원회도 더 이상 진전이 없어 보이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소련군이 북한에서 이룩한 변혁적 조치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그것은 한반도의 반쪽에서나마 임시로나마 정부를 세워  치안을 유지하고 경제를 안정시킨 다음, 통일정부 수립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나라없이 혼란 속에서 표류하기 보다는 우선 나라를 살려놓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 ▲ 1946년 6월 3일 ‘남한만의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기사. 이승만은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들어섰으므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946년 6월 3일 ‘남한만의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기사. 이승만은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들어섰으므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담한 ‘정읍발언’으로 정치적 고립을 느끼다

       그것은 폭탄적인 발언이었다.
    모두가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당에 남한 과도 정부의 가능성을 언급한  주장은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가 일어나 이승만을 맹렬히 비판했다.
       좌파는 물론, 우파 가운데서 한독당도 그를 비판했다. 심지어는 미군정도 그를 비판했다.

       그를 지지한 것은 독립촉성국민회와 한민당 뿐이었다. 주요 언론기관으로서는 <한성일보>만이 그를 지지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위험을 무릅쓸만큼 강한 소신이 있었다.
       남한지역에서 정부가 수립되지 않고 ‘정치적 미해결상태’로 계속 남게 되면, 미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흥정에서 한국을 소련에게 넘겨 줄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경우와 같은 좌우합작의 강요가 될 위험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 경우에 남한에 찾아 올 것은 공산화뿐이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발언은 미 군정청의 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지방 순회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은 이승만의 행동에 대해 더욱더 긴장했다. 자칫하면 미소공동위원회를 깨뜨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지 중장은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 원고를 미리 검열하도록 하여 소련과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내용을 삭제시키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간 1946년 6월부터는 정국의 주도권이 천천히 이승만에게 넘어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중에게 이승만은 일관된 소신있고, 또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지도자로 보였던 것이다.

  • ▲ 민족통일총본부의 모임에 참석한 이승만 박사 내외.(46. 10. 7) 자율정부 수립을 위해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던 이승만은 1946년 6월 말에 독립촉성국민회 안에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했다.
    ▲ 민족통일총본부의 모임에 참석한 이승만 박사 내외.(46. 10. 7) 자율정부 수립을 위해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던 이승만은 1946년 6월 말에 독립촉성국민회 안에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했다.

    자율정부 수립을 추진할 민족통일총본부

       이승만은 그의 목표인 자율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강력한 조직을 필요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속한 독립촉성국민회는 그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너무나 느슨한 조직이었다.
       그래서 그는 1946년 6월말에 그 조직 안에 ‘민족통일총본부(민통)’를 설치했다. 그것은 민족의 모든 세력을 통합할 것을 목표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추진하고 있는 좌우합작운동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하지 중장은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을 대표해서 좌우합작을 고취한 인물은 하지 중장의 정치 고문 가운데 한 사람인 레오나드 버취 중위였다. 그는 흑인민권운동단체와 관련이 있는 진보좌파적인 변호사 출신이었다.
       1946년 2월에 이미 미 국무부는 좌우합작 지원 지침을 하지 중장에게 내린 바 있었다.
       그것은,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협정의 틀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을 반대하는 이승만과 김구를 재외시키라는 것, 그리고 그 대신 토지개혁 등 ‘진보적인 강령’을 추진할 중도파 지도자들을 찾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김구와 이승만에 대해 어떤 호의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는 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승만을 기피하라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중도파인 좌우합작파를 돕기 위해 우파와 좌파를 모두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계에서 퇴출시키고 우파신문인 <대동신문>을 정간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했다. 그리고 그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정간시켰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