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웅장하고 긴장감 넘치는 배경음악이 흐르며 파란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등장한다. 꼼꼼히 손을 씻고 수술용 장갑에 위생모와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수술실로 들어서는 모습이 엄숙하다 못해 비장하다.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굿닥터> 등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던 TV 의학드라마에 등장하는 익숙한 장면이다.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이 간단한 장면에도 의학의 역사에서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19세기만 해도 의사들은 해부나 검시 후에도 곧바로 출산실로 달려가 아이를 받곤 했다. 또한 피 묻은 수술복을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 피 묻은 그대로 계속 입는 것을 위험하다고 인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1848년 오스트리아 빈의 산부인과 의사 제멜바이스는 병원의 산모 사망률이 일반 조산원의 산모 사망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감염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그는 의사들이 분만실에 들어가기 전 염화 석회액에 반드시 손을 씻도록 했다.

     

  • 그러자 산모들의 사망률이 2배나 떨어지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의사들이 병을 옮기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져 설득력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웃음까지 샀다. 그는 절망과 좌절 끝에 2년 후 빈을 떠났고 정신병동에서 쓸쓸히 말년을 끝마친다.

     

    사람의 가슴 한 가운데에는 쉼 없이 펌프질을 해대는 뜨거운 심장이 있고, 사람의 온몸 구석구석에는 36.5도의 따뜻한 피가 흐른다. 심장이 멎고 피가 차가워지면 사람은 죽는다. 사람의 피가 36.5도인 이유는, 적어도 그만큼은 뜨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의학드라마에서 한때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내레이션이다. 저절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명대사에도 의학의 시각에서 보면 기나긴 피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심장이 우리 가슴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과 그 뜨거운 심장이 쉼 없이 펌프질을 해댄다는 것, 그리고 피가 우리 온몸 구석구석을 흐르고, 평균 36.5도의 온도를 가졌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언제부터 알게 된 것일까?

     

    초기의 의사들은 혈관이 공기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은 오류가 증명될 때까지 45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또한 그리스 의학을 집대성한 의학의 최고 권위자 갈레노스는 피는 순환하지 않으며 일관성이 없는 방식으로 모였다가 흐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1553, 그의 이론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은 스페인의 한 의사는 이단으로 몰려 그의 책들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1603, 윌리엄 하비가 심장은 근육 펌프로 작동해 혈액이 신체를 돌아다니도록 한다고 발표하기까지 피의 순환에 관한 갈레노스의 이론은 거의 1,500년 동안 정설로 존속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당뇨병 치료를 위해 독사고기 젤리, 붉은 산호 조각, 달콤한 아몬드, 신선한 눈먼 쐐기풀 꽃잎등을 처방하곤 했다. 또한 죄수의 족쇄에서 떨어져 나온 쇳가루나 전설의 동물 배에서 나온 돌과 같은 기괴한 재료도 있었다.

     

  • 페스트가 창궐했을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약재는 50~64종의 약품에 벌꿀을 섞은 테리아카라는 약이었다. 구운 후 술에 발효시켜 으깬 독사 고기와 아편을 포함한 성분들이 벌꿀과 함께 버무려져 1년의 숙성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며 거의 2,000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중세에는 해골에서 자란 이끼, 손톱, 귀지, 마른 생리혈, 미라 등이 실제 약재로 이용되었다.

     

    1827년에서 1828년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는 에든버러 의과대학에 시신을 팔아넘기기 위해 17명을 살해했다. 그들이 살해한 대부분의 시신은 외과의사인 로버트 녹스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거래한 시신은 헤어의 하숙집에서 자연사한 사람이었다.

     

    그 후 그들은 병들거나 나이 많은 하숙인들을 술에 취하게 한 후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범행 수법이었으며, 실종된 하숙인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하숙집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의 살인 잔치는 18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검거되었고, 버크는 1829년에 처형된 후 해부되었다.

     

    복벽 일부를 잃게 된 세인트 마틴에게는 불행한 사고였지만, 의학계로서는 행운의 순간이었다. 세인트 마틴의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그의 배에는 완전하게 봉합되지 않은 구멍이 남았다. 탐구심이 많았던 버몬트는 그 구멍을 통해 9년에 걸쳐 2백여 가지 이상의 실험을 했다. 버몬트는 세인트 마틴에게 다양한 음식들을 먹이고 그것들이 소화되는 시간을 측정했다. 그는 우유는 소화되기 전에 응고되고, 과일은 가장 쉽게 소화되는 음식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위액을 모아 화학적인 분석을 의뢰했다. 그것을 통해 소화에서 화학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염산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8세기 파리의 사형집행인은 공공장소에서 의사나 약제사들에게 사람의 지방을 팔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19세기까지 간질 환자들은 방금 목이 잘린 사형수의 피를 컵에 받기 위해 단두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어쩌면 이러한 이야기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야만적이고 미개한 일로 단정지어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람(homo)’을 약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행위로 치부해버리기 전에 우리가 잠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현대 의학에서도 우리는 산 사람의 혈액이나 골수를 기꺼이 이용하고, 죽은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며,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줄기세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의학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 부러지고 찢기고 피 흘리며 원인 모를 병을 앓기도 한 것은 인류 역사 초창기부터 겪어온 일상다반사의 일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그런 질병에 맞서 주술과 미신에 기대기도 했고, 원시적인 치료법을 마련해내기도 했다. 그 대항의 역사 속에서 인류는 때로 황당무계해지기도 했고, 극한의 고통과 마주하며 인간의 나약함을 확인하기도 했다.

     

    마취제 하나 없이 사지 절단이나 유방 절제 수술을 하고, 상처 부위에 끓는 기름을 붓거나 인두를 달구어 올려놓는 소작술과 같은 처치법도 있었다.

     

    그런 극단의 치료나 처치법은 패니 버니의 이야기, 소작술의 일화를 통해 환자에게나 의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거의 고문과 다름없는 그러한 치료법도 의학의 역사가 거쳐온 과정에서 보면 죽음의 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내린 하나의 선택이자 방법이었다.

     

  • 탄생이 곧 죽음의 시작이 되는 우리 몸의 역사, 그리고 그 몸의 역사에서 쉼 없이 함께하는 질병과 그 대처법의 이야기가 바로 의학의 역사이다. 그리고 질병의 고통에 더해 치료과정에서 또 한 번 더해지는 고통까지 모두 감수해야 했던 환자들과 또 그렇게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환자를 위해 좀 더 나은 방안을 고안해내려 애쓴 의사들의 이야기가 의학의 역사이다.

     

    앤 루니의 의학 오디세이는 인류의 의학이 겪어온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해부와 관찰, 경험에 따라 인체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과 전 세계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질병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부상의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내기 위한 의학자들의 경이롭고 생생한 도전과 성취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 어떤 감동적인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앤 루니는 1967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뉴욕 대학에서 중세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으며,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과 역사 등 다양한 주제로 성인과 어린이를 위한 많은 책을 집필했다. 한국에서는 2010년에 출간된 수학 오디세이/ The Story of Mathematics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전통 있는 아벤티스 과학서적상 후보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으며, 수학 오디세이》 《물리학 오디세이》 《1001가지 놀라운 과학 사실: 재미로 풀어보는 골치 아픈 공식/ 1001 Shocking Science Facts: A Fiendish Formula for Fun》 《최첨단 컴퓨터/Computers: The Cutting Edge10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역자 최석진은 아주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 책으로 사담 후세인 평전》 《해피 후커》 《인간경영 심리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입문》 《영국인 이야기등이 있다. /정윤나 기자 okujyn@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