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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리처드 필립스 선장이 운항하던 ‘머스크 앨라배마’호가 소말리아 근해를 지나고 있었다.
머스크 앨라배마는 세계식량계획(WFP)이 소말리아와 우간다에 지원할 구호물자가 담긴 400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케냐 뭄바사 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작은 보트가 빠르게 접근, 밧줄로 배에 고정시키더니 무장한 해적 4명이 순식간에 올라탔다. 해적들의 소총과 권총의 위협에 맞서 필립스 선장은 19명의 선원들을 대피시키고 홀로 인질을 자처했다.
미 해군 특수부대가 해적 소탕작전을 펼치는 동안 그는 작은 구명정 안에서 해적들의 인질이 된 채 일각일초 생존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해군의 최첨단 장비와 저격수들 덕택에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내몰렸던 필립스 선장은 구출된다.
리처드 필립스 선장의 실제 활약상을 다룬 이 스토리는 지난해 톰 행크스 주연의 ‘캡틴 필립스’라는 영화로 제작돼 상영되면서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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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 앨라배마호 피랍 사건으로부터 5년 후인 2014년 4월.
475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항한 ‘세월호’가 제주로 향하던 중 전남 진도군 병풍도 북쪽 1.8마일 해상에서 좌초했다. 이 지역은 ‘변침점’으로, 뱃머리를 서서히 돌려야만 안전하게 항로를 바꿀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선장 이준석(69)씨가 급격하게 뱃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결박했던 자동차와 컨테이너 등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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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을 받은 해경의 경비정들이 다가오자 선장 이씨와 선원 6명은 수백명의 승객들을 뒤로 한 채 경비정으로 뛰어 내렸다. 육지에 도착해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던 선장 이씨에게 신분을 묻자 그는 ‘나는 승무원이다.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경 조사에서 정확하게 밝혀지겠지만, 그는 승객들을 각 선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본인이 먼저 탈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그가 사고 초기부터 긴밀하게 승객들을 대피시켰어도 대부분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높은 상황이다.
선장으로서 이씨의 어이없는 행동은 2012년 1월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코스타 콩코르디아’ 프란체스코 셰니토 선장(52)을 떠올리게 한다.
코스타 콩코르디아호는 4,200명을 태운 호화 크루즈선이었다. 이탈리아 서해 토스카나 인근을 지나던 중 암초와 부딪혀 좌초되자 쏜살처럼 구조보트에 올라탔다. 이를 목격한 해안구조대 드 팔코 대장이 ‘지금 당장 배로 돌아가 사람들을 구조하라’고 명령했다.
셰니토 선장은 ‘어두워 앞이 안보인다’, ‘여기서 구조를 지휘하면 안되겠느냐’는 등 변명을 늘어놓다가 한 시간 가량의 통화 끝에 ‘배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5시간 이상의 구조 작업이 끝날 때까지 돌바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승객들보다 먼저 빠져나간 셰니토 선장의 행태는 사고 직후부터 보도됐고, 해안 경비대장과 셰니토 선장간의 통화 내용은 독일 매체를 통해 온라인에 오디오파일로 공개됐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네티즌까지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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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검찰은 32명이 희생된 이 침몰 사건에서 그를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 2,697년형을 구형했다. 현재 이 재판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세월호의 키를 잡은 이씨는 청해진 해운에 입사한 이후 8년 동안 인천-제주를 오가는 항로를 운항해왔다. 다만 본래 세월호의 선장은 신모(47)씨였으나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대신 몰았던 ‘대리 선장’이었다.
자주 다녔던 항로지만 전혀 운항해보지 않았던 배를 몰다보니 익숙치 않았을 터이고, 키를 약간 과하게 회전시키는 등 단 한순간 실수로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다 보니 이성적인 사고 자체가 멈춰버리는 등 제 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본능적으로 배를 탈출하기는 했지만, 배에 남아있는 승객들 때문에 마음이 쓰라리게 아팠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스 선장이나 ‘아덴만 작전의 영웅’ 석해균 선장처럼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선장과, 이번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 셰니토 선장의 행태는 100%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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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의 생명이 걸려 있는 선박이나 항공기, 열차의 수장들에게 운항 기술 이상으로 요구되는 것이 책임감과 도덕성이다. 승객들은 이들을 믿고 몸을 맡기고 있다.
대량 운송시설의 간부들 가운데 승객보다 자신의 목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라도 빨리 직업을 바꿔야 한다.
자신의 직업에 걸 맞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본인과 사회에 비극만 끼칠 뿐이다.
평소에 안전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영리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업, 나라에 원시적 안전사고가 하도 많아 사고 예방을 하자는 취지에서 이름이 '안전행정부'로 명명된 안전 담당 부처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처럼 한 사람의 과실로 수백명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가족 친지들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되고, 국민들이 공분하고 애통하며, 전세계에 '안전불감증 걸린 어글리 코리아'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금액으로 환산조차 할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