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자본력·일본 기술력에 샌드위치 신세국내 상황 어수선, 국가 간 빅딜 꿈도 못꿔
  • ▲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 건설사업 MOU.ⓒ연합뉴스
    ▲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 건설사업 MOU.ⓒ연합뉴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여파가 한·중·일 삼국이 수주전을 벌이는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 건설사업(이하 말·싱사업)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중국의 자본력과 일본의 기술력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인 한국은 시국이 어수선한 탓에 정부 차원의 막후 교섭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입찰제안요청서(RFP)가 내년 말께 제시될 예정인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분석이다. 우리나라가 국정 혼란을 딛고 국제무대에서 특유의 막판 뒷심을 발휘할 여지는 남았다는 견해다.

    29일 한국철도시설공단은 말·싱사업과 관련 한국사업단의 구성을 전면 개편해 상부(궤도·시스템·차량) 사업과 하부(노반·건축) 사업으로 이원화한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지난 7월 양해각서(MOU)를 맺고 말·싱사업을 △궤도·시스템·차량 △노반·건축 △운영 등 세 분야로 분리 발주하기로 확정했다.

    말·싱사업은 말레이시아 구간 300㎞와 싱가포르 구간 30㎞를 고속철로 잇는 민관협력사업이다. 사업비는 120억 달러쯤으로 추정한다.

    철도공단을 비롯해 건설사, 차량제작사, 철도운영 회사 등 27개사는 이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올 2월 한국사업단을 출범했다.

    핵심사업인 상부사업에 참여하는 철도공단과 현대로템, LS산전, KT, 현대중공업, 효성 등 총 10개사는 이날 서울 더케이호텔에서 협약식을 하고 수주 결의를 다졌다.

    강영일 철도공단 이사장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양국이 다음 달 공동협약을 맺으면 말·싱사업의 본격적인 추진이 예상된다"며 "이번 한국사업단 협약식을 통해 민·관이 협력함으로써 입찰에 철저히 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말·싱사업 수주는 녹록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중국과 일본이 수주전을 벌이는 가운데 중국은 막대한 자본력을, 일본은 신뢰도 높은 기술력을 앞세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가격 대비 성능을 내세우는 우리나라는 한마디로 샌드위치 신세다.

    중국은 올 초 국내외 철도사업에 8천억 위안(약 146조456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철로총공사는 지난 1월 이 같은 투자 규모를 발표하며 고속철의 해외진출에 힘써 러시아 모스크바~카잔 간 고속철, 미국 서부 고속철과 함께 말·싱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기술력에서 앞선 일본도 말·싱사업을 해외사업 반전의 계기로 삼고자 총력전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속철 수출 후발주자인 우리나라는 동남아지역 한류 열풍에 힘입어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며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내세워 추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7월 말레이시아·싱가포르가 민자사업 발주방식을 기존에 유력하게 거론되던 BOT 방식에서 AP(Availability Payment) 방식으로 바꾼 것도 우리나라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BOT 방식은 사업시행자가 사업비를 조달해 건설한 후 자본설비 등을 일정 기간(30년) 운영하는 방식으로, 건설부터 운영까지 일괄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자금력이 풍부한 중국에 유리한 방식이다.

    반면 AP 방식은 민간사업자가 일정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면 발주 국가가 운영수입을 보장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선 위험부담을 낮추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초반 생각과 달리 현지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다"며 "중국 고속철 가격이 80원이라면 일본은 110원, 한국은 100원쯤이어서 가성비를 고려할 때 한 번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국토부 다른 관계자는 "중국은 막대한 공적자금, 일본은 신뢰도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어 샌드위치 신세인 우리나라의 수주가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라며 "하지만 중국에 유리했던 발주방식이 바뀌고 우리나라가 (일부) 핵심기술 이전과 이에 따른 철도운영유지비 절감을 장점으로 부각하고 있어 도전해볼 만하다"고 부연했다.

    지난 6월 싱가포르 지하철에 납품된 중국산 전동차에서 이상이 발견돼 전량 리콜 조처가 내려지면서 중국산 열차 차량의 품질 신뢰도가 도마 위에 오른 것도 희소식이다.

    하지만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여파로 말·싱사업 수주에도 먹구름이 끼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사업단 관계자는 "현재의 어지러운 시국은 수주전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 인프라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간 빅딜(맞교환)이 최종 의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과거 프랑스 고속철 도입이나 두바이 건설 등의 사업에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이나 군부대 파병 등이 패키지로 묶여 처리된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달 초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는데 중국에서 말·싱사업과 관련해 여러 혜택을 제시했을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며 "사업 참여 기업이 대등하게 기술력을 겨루는 게 아니라 국가 정상 또는 고위층이 적극 개입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가 경쟁에서 당분간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나마 말레이시아·싱가포르가 RFP를 내년 12월5일 제시하겠다고 밝힌 것은 다행이라는 분석이다. 구체적인 발주국가의 입찰제안요청이 나와봐야 실질적인 본경기가 시작되므로 막판 뒷심을 발휘할 최소한의 시간은 벌게 됐다는 것이다.

    사업단 관계자는 "말레이시아·싱가포르가 RFP에 앞서 내년 하반기쯤 PQ(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를 먼저 진행할 가능성도 있지만, RFP가 나오면 제안서 작성에 통상 6개월이 걸리므로 중요한 의사결정은 후년 상반기가 될 것"이라며 "그때까지 어수선한 정국을 정리하고 우리나라 특유의 뒷심을 발휘하면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