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터지는 정전피해 보상…피해액 아닌 전기료 기준 보상불합리한 약관이 전가의 보도?…설비고장에도 모르쇠2014~2018년 정전사고 합의배상 5건뿐…보상액 '미미'권익위 "피해보상기준 마련" 권고…한전 '묵묵부답'
  • ▲ 정전으로 냉해 피해 발생한 농작물.ⓒ연합뉴스
    ▲ 정전으로 냉해 피해 발생한 농작물.ⓒ연합뉴스
    지난 4일 변압기 고장으로 끔찍한 밤을 보내야 했던 서울 관악구 행운동의 68세대 주민들은 다양한 피해를 봤다. 냉장고 속 음식은 물론 열대야를 피해 모텔 등을 찾아 나서면서 안 써도 될 돈을 썼다. 40대 한 주민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가족이 자가격리 중이었는데 그동안 고생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억울해했다.

    그러나 정전 피해를 겪은 주민들이 더욱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한국전력공사가 피해에 대해 이렇다 할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서 아쉬우면 소송으로 해결하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한전이 피해자들에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전기공급약관 때문이다. 전기공급약관 제49조에는 '한전의 직접적인 책임이 아닌 사유로 전기공급을 중지하거나 사용을 제한한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면하게 해준다. 면책사유에는 △한전 전기설비에 고장이 발생하거나 발생 우려가 있는 경우 △한전의 전기설비에 대한 수리·변경 공사 △전압·주파수에 심한 불균형이나 변동이 발생하거나 발생 우려가 있는 경우 △기타 전기안전을 위해 필요한 경우 등이 해당한다. 설령 한전이 관리하는 설비가 고장 나서 정전 피해를 보았더라도 고객 입장에선 한전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는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약관인 셈이다.

    한전은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식당의 횟감이 손상돼 폐기하거나 농작물이 얼어죽는 등의 막대한 피해가 발생해도 이런 면책조항 덕분에 모르쇠로 일관한다. 지난해 8월 경기도 파주의 한 식당은 불볕더위에 변압기가 고장 나면서 정전이 발생해 100만원어치의 횟감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전은 고작 1100원을 보상해줬다. 한전은 불볕더위로 인한 변압기 고장은 한전 과실이 아니라는 태도다.

    한전이 1100원을 보상한 근거는 전기공급약관 제49조2항에 따른 것이다. 이 조항에는 한전의 직접적인 책임으로 한전 전기설비나 전압·주파수에 문제가 생겼다면 전기공급이 중지된 시간에 따라 배상하게 돼 있다. 전기공급이 끊긴 시간이 1시간 이내면 해당하는 시간의 전기요금 3배를, 1~2시간 이내면 5배, 2시간을 초과하면 10배를 각각 보상한다.

    변압기 고장으로 100만원 넘게 피해를 본 식당 사장으로선 약관대로 보상했다는 한전의 대응에 속이 터질 노릇이다.
  • ▲ 한국전력 ⓒ연합뉴스
    ▲ 한국전력 ⓒ연합뉴스
    한전의 불합리한 보상기준에 맞서는 방법은 소송뿐이다. 지난 2015년 경남 밀양의 7개 농가는 정전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던 감자·딸기·방울토마토 등의 농작물이 냉해를 입었다. 피해액은 1억6000여만원에 달했다. 농민들은 한전에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전은 변압기 내부 불량 때문이라며 보상을 거부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밀양시는 피해자료를 모아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도움을 요청했고 1년6개월간에 걸친 소송 끝에 한전의 항소 포기로 손해액의 60%에 해당하는 1억2300여만원을 보상받았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흔치 않다는 점이다. 법률지식이 없는 피해자가 한전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피해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전은 홈페이지에 정전 피해시 배상과 관련해 "정전피해는 형태가 다양해 피해액 산정이 어렵고, 고객과 한전 간 입장이 상충되기 때문에 합의배상은 어렵다"며 "정전으로 인한 손해배상 여부와 배상액은 사법부 판단에 따르는 실정"이라고 안내한다. 사실상 합의배상은 어려우니 손해배상을 받고 싶다면 소송을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201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한전에 권고한 '정전피해 배상 절차의 투명성 제고' 의결서에 따르면  2014~2018년 한전에 접수된 정전사고 피해배상 민원 236건 중 합의배상 사례는 5건에 불과하다. 1년에 1건 정도만 합의배상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권익위는 한전이 합의배상에 소극적인 이유로 정전사고 조사와 배상책임 여부를 전적으로 한전 내부직원이 판단하는 데다 배상심의회도 한전 직원으로 구성된다고 지적했다. 한전은 권익위 지적에 2020년 8월부터 외부위원을 배상심의회에 포함하고 있으나, 회의록 공개 등 운영상황에 대해선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권익위가 권고한 정전사고 피해배상기준 마련은 함흥차사다. 권익위 관계자는 "당시 한전은 자신들의 책임 기준이 명확하게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권익위 요구대로 배상기준을 단기간에 만들기는 어렵다며 이를 빼달라고 요청했었다"면서 "그래서 3~5년 중장기 과제로 검토해서 만들라고 했지만,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권익위의 권고가 구속력이 없다 보니 한전이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전 관계자는 "보상 관련 약관은 우리가 임의로 개정할 수 없다"며 "산업통상자원부와 협의로 진행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