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라이언즈 2023] 서울라이터 박윤진의 칸 라이언즈 탐방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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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휴대폰의 검은 화면을 두드리니 4시 30분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모닝도 아닌 미라클 모닝이라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이 시각 눈을 뜬 건 시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 세계 크리에이터들이 꿈꾸는 칸 라이언즈 페스티벌의 첫 날이기도 했고, 누구보다 만나고 싶던 광고계의 전설, 데이비드 드로가(David Droga)를 눈 앞에서 알현하는 특별한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데이비드 드로가가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또한 가장 용감하고, 과감하고 끈질긴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이겠다. 그가 진행했던 캠페인에는 그의 이런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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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마크 에코(Marc Ecko)를 위해 드로가는 무려 미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 ‘스틸 프리(Still Free)‘라는 그래피티를 그리고, 그 영상을 의도적으로 유출해 2주만에 23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빙(Bing)의 지도 및 검색 기능을 알리기 위해 유명 뮤지션 제이지(Jay-Z)의 자서전을 전 세계 15개 도시 곳곳에 퍼뜨려서 사람들이 퍼즐 게임을 하듯 캠페인에 참여하게 해 큰 이슈를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비욘세, 퍼렐 윌리엄스, 오바마 대통령의 마케팅을 담당하며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성공 캠페인을 만들어냈다.세상에나 그런 데이비드 드로가를 만난다니, 잠이 올리 없지 않은가! 남프랑스 해변가를 따라 늘어선 브랜드 부스들을 살피며 종종 걸음으로 도착한 메인 행사장 '팔레 데 페스티발'엔 이미 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무대 가까이 자리잡기에 성공했고,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진행자의 소개와 함께 데이비드 드로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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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칸 라이언즈 첫 날은 그야말로 '드로가 데이'였다. 오전엔 드로가5(Droga5)가 속해있는 액센츄어 송(Accenture Song)의 'Technology is creative' 강연이 있었고, 오후엔 드로가5가 진행한 리바이스 150주년 캠페인 'The greatest story ever worn'의 뒷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데이비드 드로가와 리바이스라는 저명한 두 브랜드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첫째, 스토리텔링: 강한 브랜드에는 스토리가 있다.데이비드 드로가는 만 18세에 어느 광고 회사 우편물실에서 소포를 전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호주의 라이터스 앤 아트 디렉터스 스쿨 최고의 학생으로 뽑히며 카피라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19세에 처음 담당한 프로젝트는 그 해 호주 최고의 광고를 뜻하는 '올해의 광고'로 선정된다. 더불어 모든 광고인이 꿈꾸는 칸 라이언즈를 수상한다. 22세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아닌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ECD)가 되고, 26세엔 제작 부문에서 가장 높은 직책인 CCO(Chief Creative Officer)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토록 숨 막히는 속도의 성공 스토리라니!
- 리바이스는 150주년을 맞아 '팩트는 픽션보다 강하다'는 믿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바지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파헤치고 수집했다. 그렇게 찾은 이야기는 3편의 영상과 여러 편의 콘텐츠로 제작됐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청바지와 소를 맞바꾼 남자,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501과 영면하길 바랐던 한 노인이 자신의 장례식에 모두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오길 원했던 이야기이다.둘째, 변신 능력: 위대한 브랜드는 본질을 지키면서 시대와 발 맞춘다.칸 라이언즈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받은 크리에이터로 기록된 드로가5는 모두가 원하고 꿈꾸던 CCO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한 번 더 자신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드로가 집안의 여섯 형제 중 다섯째라 불렸던 자신의 애칭을 따 드로가5라는 이름의 광고 회사를 연 것이다. 초기 직원 7명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이제 세계 곳곳에 지사를 두고 독보적인 크리에이티브를 선보이는 가장 글로벌한 광고 회사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2018년, 드로가5는 컨설팅 회사인 액센츄어와 손잡으며 예상치 못한 행보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장미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라면 청바지의 다른 말은 '영원한 청춘'이 아닐까.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인 Levi Strauss가 1853년 캘리포니아에서 설립한 시그니처 청바지 501은 탄생 15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이들지 않는 브랜드의 힘을 보여준다. 세미나 현장에서 누군가는 150년이 된 전통의 브랜드가 어떻게 젊은 세대와 연결되는지 물었고, 브랜드 담당자는 스니커즈, 음악 등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요소와 결합하고 협업해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다고 답했다.셋째, 팬덤: 강력한 브랜드에는 열렬한 추종자들이 있다.제임스 딘, 말론 브랜도, 마릴린 먼로, 스티브 잡스, 이들의 공통점은? 리바이스를 즐겨입었다는 것. 스티브 잡스 전설의 연설 중 작은 주머니에서 아이팟 미니를 꺼냈던 그날의 청바지 역시 리바이스 501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유명인이 아니어도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리바이스 501 한 벌을 마음에 품고 있기 마련이다.데이비드 드로가의 팬덤은 대중적이라 하긴 어렵지만, 업계의 수많은 광고인들이 그의 캠페인을 흠모하고 질투하며 언젠가 펼치고 싶은 레퍼런스로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팬심을 드러내고 있는 제가 팬덤의 분명한 증거입니다.)드로가5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인 스콧 벨(Scott Bell)은 브랜드가 오랜 세월 버티려면 강력한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했다. 리바이스의 최고 마케팅 책임자인 케니 미첼(Kenny Mitchell)과 리바이스 스트라우스 앤 코 아카이브(Levi Strauss & Co Archives) 이사인 타씨 파넷(Tarcey Panek) 역시 고객들이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브랜드 가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광고계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가 된 데이비드 드로가, 150년간 파워 브랜드의 자리를 놓치지 않은 리바이스, 두 브랜드가 손을 맞잡은 건 어쩌면 멋진 운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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