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ESG' 용어 폐기 수순…20년 전성기 막 내려국민연금 ESG 정책 오락가락, ESG 투자 급감'ESG 워싱' '그린 워싱' 폐해도 적지 않아 비재무적 분석 시스템은 계속 진화해 나갈 전망
  • 금융은 흐름입니다. 막힌 데 없이 구석구석 흘러가야 합니다. '이승제의 금융通'은 국내 금융권에서 일어나는 돈과 정보의 흐름을 좇아가려는 시도입니다. 딱딱한 형식주의를 벗어나 금융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고자 합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여러 얼굴을 지녔다. 지난 20여년 동안 글로벌 슈퍼스타로 각광받았다. 그러다 어느 틈엔가 정반대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허풍쟁이에 휘둘리고 있다는 폭로였다. 

    # 국민연금과 'ESG 워싱'

    국내 ESG 채권 시장은 국민연금의 손을 거치면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국민연금이 지난 2020년 "투자자산의 절반 이상을 ESG 채권으로 채우겠다"고 발표하면서다. 이듬해 ESG 채권 발행액이 전년(8조9700억원) 대비 43조3340억원이나 늘었다. 

    그러다 2022년 정권이 바뀌고 국민연금 이사장까지 교체된 뒤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시장에선 "ESG 채권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겠다는 입장을 철회한 거 아니냐"는 관측이 퍼졌다. 심지어 국민연금 쪽에서 ESG 투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 작업조차 마무리짓지 못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국민연금이 ESG 채권에 접근한 방식을 보면 충분히 그런 해석이 나올 만 했다. 국민연금의 ESG 투자 규모는 2021년 130조원에서 2022년 384조원으로 급증했다. 이는 운용사에 위탁한 국내외 주식 및 채권 자산 전체에 해당하는 284조원을 ESG 투자로 집계했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국내주식 중 책임투자형으로 운용된 자산만 ESG 투자로 잡았었다. 2022년 말 기준 이에 해당하는 건 6조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ESG 광풍'이 불자 실제 적용 여부와 무관하게 책임투자 및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한 자산운용사에 위탁한 자산 전체를 ESG 투자로 분류했다.  

    국민연금이 'ESG 워싱' 또는 '그린 워싱'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규정을 바꿔 그야말로 '앉아서 뚝딱' 숫자를 키웠다. 그것도 무려 300조원 가깝게. 'ESG' 워싱'은 실제론 그렇지 않으면서 '무늬만 ESG'인 척 하는 거짓행위를 아우르는 단어다. 

    한국 기업의 ESG 채권 발행 실적은 2021년 정점(52조3040억원)을 찍은 뒤 2년째 감소 추세다. 2021년 대비 사회적 채권의 발행은 증가했지만 녹색채권은 거의 반토막 났다. 지속가능채권은 4분의 3가량 급감했다.

    # 만능 ESG vs 진보세력의 선동

    ESG는 만능으로 통했다. 그도 그럴 게 기업의 비재무적 리스크를 파악하기 위한, 숱한 작업을 거치며 압축된 게 ESG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이 덩치를 키울수록 재무제표와 외부 감사보고서만으론 기업 리스크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됐고, 투자자들은 비재무적 리스크로 눈을 돌렸다. 

    ESG의 등장과 활용은 철저히 투자자 입장에서 진행됐다. 투자운용사나 연기금은 ESG 지표에 따라 기업들을 평가한다. 이어 스스로 투자에 나서거나 고객들에게 투자처를 골라준다. 여기서 허풍쟁이들이 개입한다. ESG 열풍에 편승해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하거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ESG 전도사'로 여겨지던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지난해 돌연 ESG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의 CEO가 ESG를 버린 것이다. 핑크 회장은 지난해 10월 “ESG라는 용어가 정치화됐고,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의미가 달라 해당 용어 사용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블랙록은 대신 '전환기 투자'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고객들에게 막연한 카테고리인 ESG에 비해 구체적이고 명확하다는 설명을 달았다. 

    정치적 변질을 이유로 들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국 돈이다. 핑크 회장은 지난 2018년 초 ESG를 내세우며 화석에너지를 많이 쓰는 기업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대신 재생 에너지 관련 투자를 늘렸지만 큰 이익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화석에너지 관련 기업들은 계속 좋은 성적을 거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같은 분위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ESG가 미국 재계에서 퇴출당하고 있다.' 이어 '자본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진보세력의 선동이라는 시각이 보수층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여년 동안 미국을 사로잡았던 ESG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얘기다. 

    #환상은 버리고 실속은 챙기고 

    뒤늦게 ESG를 좇기 시작한 한국. 그렇다면 미국 등 해외 흐름에 맞춰 우리도 ESG와 거리를 둬야 할까. 

    미국에서 ESG라는 용어를 버리기 시작했지만 ESG의 개념까지 폐기처분 운명에 놓인 것은 아니다. ESG 정책과 실천들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 다양한 개명 과정을 거치면서 투자의 든든한 '안전판'으로 작동하고 있다.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고 분석하는 기준과 시스템은 계속 진화해 나갈 것이다. 

    다만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듯, ESG를 마케팅이나 홍보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시도를 차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종이컵을 쓰지 않기로 했다거나 직원들을 강제 퇴근시키면서 전기를 줄였다는 식의 생색내기도 경계해야 한다. 

    늘 그렇듯 패거리식 쏠림 현상은 위험하다. 어설픈 한탕주의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