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데일리는 자유주의연대가 발간한 <권력 저널리즘의 꽃, '코드방송 괴물 포털'>을 연재합니다. 11부 '제7장. 정체불명 인터넷 정치여론의 창시자 노무현-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입니다.
     

    “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 -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온하다.”

    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에 즈음하여 영국의 진보성향 일간지 가디언은 2002년 대선의 성격과 노무현 당선자의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아주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멀리 있어도 보이는 것은 보이고 인터넷은 멀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강한 소신과 파격적이고 대중적인 언술은 지금이야 고독한 깡다구로 남아 과거의 영광에 그치지만 열광을 발산하고 유인하는 매력과 파괴력이 있었다. 돈 빌려달라고 힘겹게 부탁하면 거절당하기 십상이지만 당연히 받아야 할 자기 돈을 달라는 듯 당당하게 요구하면 어이없이 돈을 빌려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망하고 혹시나 손해 볼까 봐 감추는 것이 더 좋아 보이는 경우마다 상식을 뛰어넘어 대놓고 솔직하고 대담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조폭언론과의 전쟁선포나 불법 대선자금의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 이상이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발언도 그렇고, 재신임을 받겠다는 정면돌파 의지, 탄핵하려면 해보라는 식의 기성에 대한 저항, 선거공학의 엑기스로 꼽히는 ‘선거는 구도’ 정식화도 인터넷 여론에 대한 선동의 구호였다. 그때마다 노사모, 서프라이즈와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인터넷 조직과 매체들은 환호하며 말 그대로 ‘소수의 입김’을 국민여론으로 전면화시키며 실로 한국의 정치를 일변시켰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탄핵총선의 판이 그러했다. 진정한 국민여론에 의해 거부되었던 그해 말 4대 개혁입법 관철시도와 이로 인한 극심한 정치혼란은 반대의 경우로서 인터넷 정치여론의 폐해를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인터넷 정치여론과 노 대통령

    인터넷 여론이 조금 큰 규모에서 정치를 좌우한 최초의 계기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이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1980년대의 운동권이 시민단체연합의 형식으로 인터넷 채널을 통해 호소하고 시민들은 심정적으로 적극 동조하면서도 수동적으로 호응한 것으로, 그 이후 전개된 파괴적인 인터넷 정치여론과는 질적으로 차별성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당시 총선에서는 낙선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터넷 여론의 위력을 인식하게 된 시기는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가 만들어지고 회원이 수천 명으로 늘어갈 때쯤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리고 2002년 2월 5일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경선후보가 선관위에 의해 중지요청을 받은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전격적으로 강행한 즈음에는 구체적으로 실감한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뉴스가 당시에는 등록된 언론이 아니어서 후보 인터뷰는 선거법 위반에 해당된 모양이다. 그날 오마이뉴스 사무실 앞에는 선관위 직원 50명이 노무현 후보와 한 시간 동안이나 대치하며 실랑이를 벌였고 노 후보는 언론자유를 가로막는 행위라고 규탄했다. 그 물리적 충돌의 영상이 오마이뉴스 속보와 동영상으로 중계되며 160만 건의 페이지뷰를 기록했다. 이것이 노 후보가 오마이뉴스와 한 몸이 되고 상생상발(相生相發)하여 소위 노풍(盧風)의 큰 흐름으로 몰아쳐갔다. 요즘에도 여전한 “그놈의 선거법, 그놈의 헌법” 타령은 그 연장선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후 최초의 단독 인터뷰를 오마이뉴스에 선물했고, 청와대 출입기자실을 열어주었으며, 신문법을 개정하여 신문발전기금을 지원해 주었다. 오마이뉴스는 2004년 총선 직전에 국회에서 삭감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예산 5억 원을 단 11일 만에 인터넷으로 모집하고 노 대통령에게 유리한 인터넷 여론을 만들어주는 등의 방법으로 보답했었다. 기브앤테이크(Give & Take) 정도가 아니라 한 몸으로 같이 움직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또 2003년 12월 19일에는 대통령 취임 1주년을 기념하여 노사모를 비롯한 지지자들이 여의도 공원에서 개최한 ‘리멤버 1219’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였다. 한나라당을 3~4급수로 비유하여 1급수가 없으면 2급수인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1천 5백여 지지자들 앞에서 지난 대선은 시민의 승리이고 아직도 시민혁명은 계속되고 있으며 노사모가 다시 뛰어달라고 호소했다. 동영상으로 생중계되는 현장에서 대통령의 신분으로 지지자들과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선동한 셈이다. 정체불명 인터넷 정치여론의 창시자 노무현의 대단한 업적으로 2004년 3~4월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리멤버 1219 행사의 선거포스트 재현 (출처: 조선일보, 2003.12.19)

    노무현 이후의 인터넷 여론의 방향

    다수가 개혁악법이라고 부르는 2004년 4대 개혁입법의 실패 이후 참여정부의 정책실패와 막무가내 발언으로 창시자 노무현 대통령은 더 이상 인터넷 여론 주도자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지 못했다. 개혁을 빌미로 대연정 제안, 3적(서울대, 강남, 삼성)에 대한 적개심 발동, 헌법 같은 부동산 정책 드라이브와 호소로도 인터넷 여론이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서지 못했다. ‘안희정 리포트’(2005년 청와대 실무그룹의 보고서 ‘정치지형 변화와 국정운영’)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고립된 인터넷 공론장을 재구축해야 하며, 서프라이즈 외에 제2, 제3의 인터넷 토론그룹이 형성되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안을 세웠다. 그러한 시도의 한 방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민광장(유시민 의원 팬클럽 사이트)은 오픈되자마자 분야의 수위에 올라있다. 여전히 인터넷 여론은 진보와 개혁 또는 좌파의 입김이 드셀 수 있는 조건이 유지되고 있으며, 순간의 명분과 특정한 매개를 포착해 대중의 공분을 조작하여 분출될 것이다. 현재의 인터넷 정치여론은 탁월한 주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정체불명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반노무현의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나 창시자의 후계자가 등장하거나, 2004년 총선시민연대와 같이 자체적으로 결집된 코어 세력이 다시 인터넷 여론을 정체불명의 광분으로 몰고 갈 가능성은 충분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2007년 6월 28일 세계시민기자포럼 개회식에 보낸 축하영상 메시지를 통해, 온라인 시민참여 저널리즘이 정치와 언론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찬양과 함께 더 많은 시민들이 기사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여 언론의 정치 세력화를 견제해줄 것을 역설하였다. 더불어 본인도 임기를 마치면 시민주권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할 뜻을 밝혔다. 마지막까지 창시자다운 꿋꿋한 모습이다.

    저자소개
    최홍재
    1968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조통위원장 대행, 한총련 조통위 정책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과 뉴라이트은평연대 대표로 활동 중이다.

    김배균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민중연대사업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정치웹진 뉴라이트폴리젠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