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5일 오피니언면에 김호영 전 KBS 교육국장이 기고한 'KBS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48년 8월 7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며칠 전에 국회를 통과한 정부조직법은 KBS를 공보처 산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이날부터 KBS는 국영방송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란 대한방송협회는 반대 성명을 내고 국회를 방문했으나 이미 때를 놓친 후였다. 당시 대한방송협회는 KBS 네트워크를 망라한 전국적 조직이었다.

    1960년 4월 26일 KBS 서울방송국 아나운서실 소속 아나운서 28명은 4·19의 기운에 힘을 얻어 다음과 같은 '방송 중립화 선언'을 채택하고 방송과 신문을 통하여 널리 공표했다.

    1, 방송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불편부당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2, 우리들은 방송의 중립화를 요구한다.

    3, 우리들은 앞으로 공정성을 잃은 일체의 편파적인 방송을 거부한다.

    공무원 신분이었던 그들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떨쳐 일어난 선언이었지만 5·16으로 그 선언문도 휴지가 되고 말았다.

    1973년 3월 KBS는 하향식 조치로 국영을 공영으로 전환하는 역사적 변혁을 이루었으나 그때만 해도 KBS 직원들은 자신의 신분 변동에만 관심이 있을 뿐, 공영방송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설사 바른 의식을 가진 몇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이룰 정치적, 사회적 환경은 아니었다.

    1993년 민주화 운동으로 세워진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KBS노동조합은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사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강력한 취임 저지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이것이 KBS로서는 정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가장 최근의 몸부림이었으나 이것도 낙하산 사장 취임을 옹호하는 일부 간부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KBS는 이처럼 해방 후 60여 년 동안 편파방송으로 끝없는 국민적 저항에 시달려 왔으나 그렇다고 방송 종사자들의 의식마저 죽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방송인 선배들은 기회만 있으면 방송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 선배들의 꿈을 성취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온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명박 정부가 그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지 모른다. 그런데 방송의 중립화라든가, KBS의 진정한 공영화 같은 것은 조직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의지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서 시민단체의 압력으로 오는 것도 아니다. KBS의 개혁은 오직 KBS를 구성하고 있는 방송요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각과 실천에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모든 뉴스나 프로그램의 구석구석에서 공영방송으로서의 정체성을 구현할 때만이 명실상부한 KBS의 위상이 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KBS 1TV 1월12일 미디어포커스)에서 정연주 사장의 임기(2009년 12월)는 보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자들이 있는 한, '공공방송 KBS'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기자면 기자대로, PD면 PD대로 모든 요원들은 오로지 시청료를 부담하는 시청자만을 바라보고 봉사하여야 한다.

    앞으로의 정부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줄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난 10년간 편향 방송과 코드 인사를 뼈저리게 보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KBS는 이제부터라도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고, 또 민간방송에도 눈을 돌리지 말고, KBS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방송, KBS만이 할 수 있는 방송을 추구하여야 한다. 오만한 권력을 가차없이 비판하겠다는 것과 같은 적의(敵意)를 품지 말고 사랑으로 국민과 함께 가는 너그러움과 여유를 보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전두환 정권의 잘못된 정책으로 억지로 떠맡은 제2 TV를 털어버리고, 전파 낭비를 하고 있는 EBS를 흡수하여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만들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