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이 경제 위기의 파고를 넘기 위해 '현장'과 '속도', '도전'을 강조하며 상대적으로 젊은 수장들을 대거 경영 전면에 내세웠다. 반면 이기태 부회장, 황창규 사장 등 지난 수 십년동안 한국 전자산업을 이끌어온 '신화'의 주역들은 일선에서 물러난다.

    ◇ 고홍식 박노빈 등 17명 퇴임
    16일 단행된 삼성 그룹 사장단 인사 결과,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서는 '삼성 애니콜 신화'의 주인공인 이기태 대외협력담당 부회장과 반도체 신(新) 성장이론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황창규 기술총괄 사장의 퇴임이 결정됐다.
     
    이 부회장과 황 사장은 각각 삼성전자의 주력 제품인 휴대전화와 반도체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인물로, 그동안 삼성전자 직원들에게는 '아이콘(상징)'과 같은 존재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07년까지 7년동안 정보통신총괄을 사장으로 재직하며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프리미엄' 전략을 통해 삼성전자 휴대전화 '애니콜'을 세계 시장 점유율 2위 자리까지 끌어올렸다.

    지난해 반도체총괄에서 기술총괄로 자리를 옮긴 황창규 사장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 전문가로, 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1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을 창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D램 뿐 아니라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도 삼성전자가 세계 1위를 석권하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1948년생인 이 회장의 경우 나이 기준에 따라 퇴임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삼성그룹 인사가 1948년 이전 출생, 즉 60세가 넘는 인사의 퇴진을 원칙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황 사장의 경우 1953년생으로 나이 기준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2000년 이후 줄곧 대표이사를 맡아 CEO로서 '장수'했고, 후진 양성 작업이 끝났다는 판단에 따라 스스로 퇴임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관계자는 "두 분다 흔쾌히 용퇴를 결정하셨다"고 전했다.

    그룹 전체로는 기존 사장단 가운데 17명 정도가 퇴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장은 상근 고문을 맡고 고홍식 삼성토탈 사장,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 제진훈 제일모직 사장, 박노빈 삼성에버랜드 사장, 박양규 삼성네트워크 사장, 이현봉 삼성전자 서남아 사장, 이용순 삼성정밀화학 사장, 오동진 북미사장, 양해경 구주사장 등도 상담역으로 물러난다.

    ◇ 이윤우 최지성 권한 집중, 배호원 복귀

    반면 이번 인사와 조직개편을 통해 삼성전자 이윤우 부회장과 최지성 사장은 각각 디바이스솔루션(부품) 부문장과 디지털미디어.커뮤니케이션(셋트) 부문장을 맡아 막강한 권한의 '쌍두마차'로 떠올랐다. 지난해 5월 삼성의 '쇄신 인사'에서 윤종용 부회장의 빈 자리를 메우며 삼성전자의 사령탑이 된 이 부회장은 이번 인사로 다시 '포스트 윤종용' 체제의 핵심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이 부회장에게는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품부문장, 사장단협의회 산하 기구인 투자조정위원회 위원장, 이번 인사를 주도한 인사위원회 위원장 등 핵심권한이 집중됐다.

    이 부회장은 지난 1968년 그룹 공채로 삼성전관에 입사해 1977년부터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면서 '삼성 반도체' 성공 신화를 일궈낸 주역이다. 오랜기간 반도체총괄과 기술총괄을 맡아 삼성 경쟁력의 기반인 기술개발전략 전반을 챙겨왔고, 대외협력 담당으로 글로벌 거래선과의 원활한 네트워크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 정보통신총괄 사장인 최 사장은 앞으로 디지털미디어까지 더해 디지털미디어.커뮤니테이션 사업을 진두지휘한다. 최 시장은 그동안 삼성전자 안에서 반도체, 디지털미디어, 정보통신 분야를 두루 거치며 삼성전자의 글로벌 기업 도약에 크게 기여했다. 반도체 해외영업을 담당, 14년동안 반도체 신화에 일조했고, 2006년에는 보르도TV를 앞세워 삼성전자 TV를 세계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지난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1인 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은 뒤 1000여 페이지 분량의 반도체 기술교재를 암기한 후 바이어들을 상대했고, 알프스 산맥을 차량으로 넘어 다니며 부임 첫 해 100만 달러 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삼성전자의 장원기, 윤부근 부사장도 각각 LCD와 TV 사업 성과에 힘입어 사장으로 한 계단 올라섰고, 최도석 경영지원총괄 사장은 삼성카드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밖의 계열사에서는 노사안정.수익성개선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김징완 삼성중공업 대표이사가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이상대 삼성물산 건설 사장도 아파트사업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함께 부회장직에 올랐다. 

    '재무통' CEO들의 약진도 눈에 띈다. 삼성 특검 사태로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으로 물러났던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은 삼성정밀화학 사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삼성생명, 삼성투신, 그룹 비서실 등에서 재무를 도맡아왔다.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삼성에버랜드 사장에 내정된 최주현 삼성코닝정밀유리 부사장도 1979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래 자금.경영관리, 그룹 경영진단 등의 업무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위한 인사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홍보 담당 인사들도 웃었다. 그룹에서 기획과 홍보 업무를 맡았던 삼성물산 장충기 부사장이 사장 승진과 함께 삼성브랜드관리위원회장의 중책을 겸한다. 역시 그룹 홍보 업무를 총괄했던 삼성물산 윤순봉 부사장도 사장으로 승진했다.[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