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을 주도하는 북한 특권층
     
     
     충성만 알던 특권층 자녀들이 돈맛을 알게 된 다음부터 북한은 급속도로 변했다. 
     
    북한이 작년 말 화폐교환을 단행한 기본 이유는 시장자본과 함께 시장인력을 회수하기 위해서이다. 국가 유일경제가 주도하던 상품 가격을 시장이 독점하고 국가가 관리해야 할 인력들이 시장에서 생존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한 시장은 이념과 그 논리대로만 체제를 유지해오던 김정일을 매일매일 당혹하게 만드는 골칫거리이다.

    1990년대 초 김일성이 허용한 '농민시장'은 옛말

    그런데 그 시장은 현재 일반 주민들이 아니라 북한 특권층들이 주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990년 초반까지 북한에는 시장은 없이 생산과 공급의 질서만 있었다.
    김일성이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농민들에게만 허락했던 원시적인 농민시장이 고작이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대량아사가 발생하자 배급붕괴를 인정한 북한 정권은 초기에 이 농민시장을 통해 쌀이나 간장 같은 생존식품 판매만을 허용하려 했었다. 

    그런데 정작 시장 문을 열었더니 쌀을 파는 사람보다 쌀을 사기 위해 가장물을 내다 파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결국 통제할 틈도 없이 무제한으로 확대되며 시장은 생존을 넘어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많은 주민들은 해당 직장들에 소속되어 시장을 그냥 쳐다보기만 할 때였다.
    그러나 국가가 계속 배급을 주지 못하자 직장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북한 정권은 대량아사에 대량탈퇴라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을 겪게 됐다.

     급기야 북한 정권은 1996년 초 기관들이 자체로 벌어서 소속 직원들에게 식량공급을 하도록 지시했고 그때부터 무역회사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게 됐다.
    무역회사들은 많이 만들어졌지만 북한의 유일한 외화금고인 김정일 당 자금 관리 39호실, 38호실이 굳게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성을 비롯한 어느 기관도 중국과의 무역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북한에서 석탄, 광물, 목재 등 자원들을 주면 중국 상인들은 대신 쌀을 줬는데 이런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이라도 제대로 가동되게 내버려두었다면 아사자가 300만까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물교환 때문에 수출 허가는 해주었는데 충성의 외화자금이 들어오지 못 한다며 김정일은 1997년 국내 실정은 안중에도 없이 현금거래의 무역만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北中무역이 냉각되며 쌀이 들어오지 못해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게 됐고, 국가 기관의 신용을 믿고 투자했던 중국 상인들 또한 빚더미에 오르게 됐다.

    김정일 통제 안통해...자본층-권력층 결탁

    김정일은 혹을 떼려다 혹을 더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북한이란 국가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중국 상인들은 모든 거래를 현금화 하자고 했고, 그래서 북한무역은 기관이 아닌 돈 있는 개인들의 활무대가 됐다.  

    하여 돈만 많으면 과거 경력이 어떻든 권력기관들이 서로 모셔가려 했기 때문에 북한 노동당의 인사원칙도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곧 주민들의 체제의존 심리와 가치관도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됐다. 북한과 중국과의 현금거래 무역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북한 내 자본 특권층과 권력 특권층과의 결탁관계를 형성하게 한 것이다.  

    충성만 알던 특권층 자녀들이 돈맛을 알게 된 다음부터 북한은 급속도로 변했다.

    권력과 자본이 결합하여 중국 상인들에게서 싸게 받은 각종 물건들을 배로 비싸게 북한에 전파시키자 시장은 도매와 소매의 구간도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보다 활성화 됐다.
    그러나 워낙 극빈국가라 1년도 안 돼 소비의 한계에 직면하자 중국에 빚지는 간부 자녀들도 속출했고 심지어는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북한 특권층 자녀들이 수출입을 주도한다. 사진은 단둥세관. ⓒ 연합뉴스



    중국에 빚진 자녀들 속출...살해 당하는 사건도

    그 사건 후 북한 정권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위해 산재해 있는 무역회사들을 통폐합하고, 기관 특성에 맞는 품목만 수입, 수출할 수 있도록 무역회사들의 권리를 제한했다.
    이를테면 농업성은 농작물만, 석탄공업성은 석탄, 광물만 수출하도록 했다.

    북한 간부들은 노골적으로 김일성의 “교시”는 법이었지만 김정일의 “말씀”은 그냥 말이라고 한다.  

    당이나 군, 국가보위부와 같은 권력기관들이 김정일 유일비준제도를 이용하여 저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제의서를 올려 사인을 받으면 그 문건을 법적 근거로 어떤 문제든 다시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특권층 자녀들이 운영하는 당과 인민무력부 산하 회사들이 국내 주요 광산과 어장, 등 수출생산 기지들과 함께 모든 수입 권한을 독점하고, 내각은 아무 권한도 생산도 없게 됐다.  

    우후죽순 난립한 '회사의 시대'...특권층자녀들 재테크 앞장

    그 덕에 시장만 더 커졌다.
    그래서 내각 산하 기관들을 살릴 목적으로 홍성남 내각총리가 김정일에게 제안한 것이 “합의제”였다. 합의제란 텅 빈 국영상점과 식당들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개인, 혹은 타 기관에 빌려주어 7:3으로 이윤을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관들이 숨 쉴 여유도 생기고 보다는 개인들이 가격을 주도하는 밖의 시장을 국영상점 안으로 점차 끌어들여 통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적극적인 지지로 북한은 시장을 폐쇄하고 시장가격보다 조금 싼 공시가격으로 국영상점들의 문을 열었다. 그 길밖에 없다고 오판한 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국영상점과 음식점들을 대여했지만 상황은 정 반대였다. 이미 비즈니스맨이 된 특권층 자녀들이 남보다 앞선 정보력으로 강제적인 물가하락에 대비하여 갖고 있던 물건들을 싸게 팔아버리는 통에 공시가격은 실행 초기에 붕괴되고 말았다.  

    예전에는 바깥만 시장이었는데 그때부턴 온 나라가 시장이 되고 말았다.

    시장과 국영상점 사이에 물가경쟁까지 벌어지자 김정일은 1년 후 합의제를 폐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독재자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점은 덜하지만 음식점 같은 경우 개인 투자자들이 이미 인테리어를 새롭게 하는 등 시장화 돼 버린 것이다. 

    자녀들의 선택 앞에 부모도 김정일도 속수무책 

    기관들도 합의제에 적응되었기 때문에 합의제 폐기는 곧 내각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북한 권력층 자녀들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김정일은 당조직부 4과(중앙당 간부들 비리적발 전담 부서)를 통해 중앙당 비서급 이상 간부 자녀들의 현직상황을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아마 그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남다른 충성의식을 갖고 있는 최측근들도 자녀들이 선택한 가치관과 미래를 막을 힘이 없었을 것이다.  

    이를 경고하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로 2002년 중앙당 전체 직원들을 상대로 자녀교양 주제의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그 강연회 이후부터 중앙당 비서급 대상 자녀들이 외화벌이 기관에 취직할 수 없도록 제한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을 축출한다면 북한의 대외무역이 마비가 될 만큼 시장은 이미 그들을 중심으로 권력화 돼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주 하는 말처럼 나라에 돈이 없어 돈으로 애국하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오극렬 자녀들은 '축재'아닌 선전선동 전사로 키워

    김정일이 오극렬을 더 신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자녀교육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들은 자녀들을 외화를 버는 무역, 혹은 대외업무에 종사하게 한 반면. 오극렬은 자녀들을 모두 북한식대로 말한다면 당 선전선동 전사들로 키웠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들인 맏딸 오혜옥은 노동신문사 기자, 오혜영은 4.25영화문학창작사 작가, 오혜선은 조선인민군신문사 기자, 오영혜는 평양외국문출판사 기자, 막내딸인 오영희는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민군기록영화촬영소 기자로 일하게 했다.  

    외아들인 오세욱만 상좌 군복을 입고 인민무력부 산하 외화벌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2004년 그가 미국으로 망명 했다는 설도 있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현재 북한 특권층 자녀들은 대부분 38호실, 대남공작부서들을 비롯한 당이나, 호위사령부, 인민무력부, 국가보위부와 같은 권력 기관 소속 회사들에서 활약하고 있다. 

    백만장자된 자녀들, 수출입 주역...이권 정책 주물러

    북한의 백만장자들인 그들은 당과 군의 주요 회사들에서 사장, 혹은 간부직에 근무하면서 북한의 수출과 수입을 주도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북한의 시장가격을 조종하고 있으며 심지어 달러의 힘으로 저들의 이권과 관련한 국가정책까지 주무르고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든다면 김정일은 2002년 평양화력발전소에서 전기 생산이 잘 되지 않는 원인이 석탄 공급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보고를 받고 석탄수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에 수출되던 석탄이 평양화력발전소로 들어오자 평양시 전기공급도 1개월 동안은 하루 4시간에서 8시간으로 길어졌다. 그러나 한 달 후 조선인민군총정치국54부가 (김정일에게 군 정치자금을 보장하는 회사) 군복천 수입 명목으로 석탄수출 허가를 받으면서 다시 석탄수출은 권력기관들의 주요 돈벌이가 되고 말았다.  

    권력은 돈이 되기도 하지만 야심을 가지면 무기도 된다.

    돈에 환장한 특권층 자녀들은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무역을 함께 시작했던 자본 특권층까지 모함 숙청하여 회사 이권을 독점하는 등 충성권력가들인 아버지들과 달리 자본권력가들이 됐다.

    햇볕정책 선물도 자녀들이 중국수출로 큰 재미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남북경협이 활성화되던 2001년 이후부터는 남북교류 전담 기관들인 당38호실, 통전부, 산하 회사들에 근무하는 특권층 자녀들이 많은 이익을 챙겼다.  

    대북물자들은 상품 분류에 따라 해당기관으로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적선물자로 당에서 종합관리하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제의서에 따라 공급된다.
    대북물자 담당 부서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북한 시장이나 중국에 역수출하는 방법으로 이른바 충성자금 명목하에 많은 외화를 벌었다.  

    그들을 통해 알 수 있듯 북한 특권층 자녀들부터가 김정일 정권을 자기들의 미래로 더 이상 보지 않는다. 다만 자기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현재의 가치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때문에 김정일이 자기의 신격화를 중심으로 신분사회를 고집하는 한,
    지금의 상황에선 붕괴는 곧 시간문제이다.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