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은 진정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인가
     
    청년기업가들, 대기업 인문학 수요 급증 흐름
     
     
    얼마 전 어느 필진들의 모임에서 한 대기업 최고위층 간부가 아주 강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인문학의 시대를 강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각 대학의 기업인을 상대로 하는 인문학 강좌에는 자리가 없어서 들어갈 수 없을 정도”, “앞으로 3-4년만 지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문학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예측하기도 했다. 그 모임에는 국내의 저명한 철학자 한 분도 있었다. 그 분은 “솔직히 정년퇴직할 때까지 철학과가 남아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94년도, 인문대학에 입학했을 때 수도없이 들었던 이야기가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90년대,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등등의 대부분의 사상 계간지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를 논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에 이르니 “아직도 인문학의 위기인가”라는 말들이 무성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더 이상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 자체도 나오지 않는 판이다.

    인문학은 역사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라는 말이 진실일까? 인문학의 위기는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회 분위기 탓일까? 인문학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 않은 뒤떨어진 학문일까? 그렇다면 경영학이나 법학, 경제학과 같이 이른바 돈이 된다는 학문에 뛰어드는 학생들은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일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인식들은 사회적 편견에 불과하다.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 아닐 수도 있고, 인문학이 물질주의적 세태 때문에 퇴보한 것도 아니고, 디지털 시대에 뒤쳐진 학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경영학과 경제학, 법학 등도 돈이 되는 학문이라고 구분할 수 없다.

    대학 1학년시절 인문대학의 첫 강의 때 서울대 미학과 오병남 교수는 “미학 뿐 아니라 인문학의 기초는 문학과 언어이니, 저학년 때는 부지런히 문학과 언어를 공부하라”고 강조했었다. 철학, 역사학, 미학, 종교학 등을 공부하기 위해선 고대 때부터 인간의 삶을 탐구해온 수많은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언어 학습이 필수적이다. 언어 학습이란 영어 같은 외국어만 의미하지 않는다. 최소한 국어라도 똑바로 알아야 수많은 단어로 구성된 문학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읽는다는 의미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전 인류가 살아온 삶의 행태와 언어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발작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는다면 19세기 프랑스에서 귀족사회가 신흥부르주아 시대로 넘어가는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셔우드앤더슨의 ‘와인즈버그오하이오’를 읽는다면 20세기 초반, 역동적인 삶의 살아온 미국인들의 깊은 내면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리얼리즘이라는 이론부터, 프랑스의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다.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과 언어를 습득하면서,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한다면, 흩어진 삶의 모습들을 일정한 논리으로 체계화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문학의 교양과 깊이를 알아간다는 것은 삶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나간다는 의미이다.

    만약 대학 4년 간 이런 학습을 제대로 해낸 학생이 과연 사회적으로 무능력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른바 돈이 된다는 학문인 경영학의 원리는 결국 사람과 조직을 다루는 기술이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포장마차 한번 운영해본 적이 없는 학생이 경영학의 원론만 공부해서 과연 경영학을 제대로 현실에 실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삶과 현실에 대한 이해를 탄탄히 한 학생이 경영학을 공부한다면 훨씬 더 현실 적합한 이론과 실천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이 때문에 미국에서 경영학이라 하면 기업 경험자들이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MBA과정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21세기는 그야말로 범 글로벌 시대이다. 웬만한 중소기업을 하려고 해도,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데 애를 먹는다. 미국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미국의 문학과 미국의 철학을 공부하는 게 도움이 안 될까? 오히려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 예측하는데 전 세계의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 항목이 아닐까?

    현재 대부분의 기업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한류 마케팅만 해도, 인문학이나 문화적 통찰력 없이는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인터넷, 뉴미디어 등만 하더라도 새로운 문화와의 소통이라는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사업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청년기업가들의 모임인 실크로드CEO포럼의 회원들 중 여원동 수석부회장을 제외하고는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인문학 전공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이른바 인문적 소양을 갖추었다고 평가할 만한 회원들은 눈에 띈다.

    기업을 경영한다 할 때의 인문적 소양이라는 것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예의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문적 소양을 갖춘 기업인은 한치 앞의 이익을 따라가지 않고 무지한 자가 볼 때는 멍청할 정도로 손해를 보는 일만 하는 듯하지만, 중장기적인 사업적 비전을 추구한다. 그 비전이 실현되면 이른바 대박이 터지는 것이고, 인문적 소양이 없는 자들의 눈에는 “한방으로 벼락치기에 성공했다”고 보이겠지만, 사실은 비전 하나를 실천하기 위해 온갖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역사와 인간을 믿고 올바른 길을 걸어온 결과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인에게 인문적 소양은 필수적이고, 시작하자마자 온갖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청년 창업가에게 인문학은 생명수와 같은 존재이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측면에 있다. 인문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바로 이러한 인문학의 가치를 제대로 배우고 졸업하느냐는 것이다. 역사학을 4년 배웠다고 해서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고, 철학을 4년 배웠다 해서 철학적 깊이를 더 알고 사회에 뛰어들 수 있는가? 각 기업에서 인문대학 졸업생을 홀대한다면, 그것은 인문학 자체를 홀대한다기 보다는 인문대학 졸업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 신뢰를 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영학이나, 경제학, 법학을 전공한 예비 취업자들이 이들 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인문학은 물론 대학의 교육체계 자체가 심각한 수준으로 변질되는 흐름이다. 예비 취업자들은 각 기업의 서류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온갖 화려해 보이는 경력만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결국 기업들의 채용관행과 대학의 교육체계를 바로잡는 일이 인문학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선결 조건인 셈이다.

    청년기업가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 커리큘럼 개발 필요

    인문학은 실용학문인, 법학, 경영학, 심지어 경제학, 사회학과 같은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위한 필수과목이다. 삶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삶을 제도적으로 규율하는 법학을 어떻게 공부하겠냐는 것이다. 즉 인문학은 법학, 경영학 등과 구분되는 학문이 아니고,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부해야할 필수과목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화려한 포장경력 이외에 인문적 통찰력을 검증할 수 있는 채용방식을 스스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청년기업가들의 입장에서는 창업가들이 갖춰야할 인문학 교육 커리큘럼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청년창업이라는 것은 기업 경영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험난하고 혹독한 길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인문적 소양도 일반인과는 분명히 다른 측면이 있다. 인문학에 목말라는 청년기업가들이 대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인문학과 인문교육에 대한 논의도 방향을 다시 잡아야할 필요가 있다. 지금 대학에서 인문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인문학자들은 냉철히 검증해봐야 한다. 자신들의 학생을 누구에게 추천할 때, “인문적 소양과 통찰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증할 수 있는 인문대학의 교수들은 그리 많지 않을 줄 안다. 제대로 교육이 되지도 않으면서,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니 학생들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손으로 자기 뺨을 때리는 격이니, 답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