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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전통시장 살리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을 잃어버린 시장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7년 사이에 178개 시장이 문을 닫았다. 없어진 시장은 대체로 점포수가 50여개 정도인 소규모 시장. 규모가 작아 지원도 못 받고 낙후된 환경을 유지하다 결국 존폐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점포수가 적으면 사실 버티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하는 시장이 있다.
서울 관악구 인헌동 인헌시장 김보현 상인회장(사진)은 “작은 시장일수록 집중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점포 하나하나가 더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시장이 크면 물건을 비교하고 사기에 좋죠. 상인 입장에서는 손님을 동종 점포의 경쟁자들과 그만큼 나눠야 하는 단점도 있어요. 우리 시장은 겹치는 점포가 많지 않아 상인들이 집약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인헌시장에는 약 55개의 점포가 있다. 같은 구에 있는 신원시장, 신사시장 등과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된다. 하지만 매출이나 고객 수는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평일에는 4천명, 주말에는 5천명 정도가 장을 본다.
‘작은 점포수’로 시장이 살아남은 비결은 상인회의 결속력에 있다. 김 회장은 지난 2008년 몇몇 젊은 상인들을 주축으로 상인회를 만들었다.
“상인들이 단합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상인회가 반드시 필요했죠. 우리 시장은 노후화돼 상인 평균연령이 60대입니다. 이들을 이끌어갈 리더십이 시급했어요.”
김 회장은 지난 2009년부터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39살이었던 그는 서울 최연소 상인회장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시장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상인들의 의식변화가 필요했다. “공동판매와 상인아카데미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갔다”고 그는 설명했다.
“가게마다 돌아가면서 물건을 대량으로 떼와 싸게 파는 공동판매를 진행했습니다. 지난해 배추 파동 때는 배추를 싸게 파니 몇 분 만에 물량이 모두 팔려나갔어요. 상인들이 협력해서 장사를 하다 보니 공동체의식도 강해졌죠.”
시장경영진흥원에서 지원하는 상인아카데미도 추진했다. 같이 교육을 받다 보면 허물없이 친해지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 않겠냐는 이유에서다.
“전체 상인이래야 50여명 밖에 안돼 상인교육을 추진하는 것이 처음엔 어려웠어요. 최초 인원이 30명은 되어야 수업을 할 수 있는데, 전체 점포들이 다 문 닫고 와서 수업을 들을 순 없잖아요. 설득 끝에 절반 정도를 교실로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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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에는 현대화 사업도 마무리했다. 1980년대부터 있던 시설을 30년 만에 최신식으로 바꾼 것이다. 낡아서 군데군데 패었던 도로를 깔끔하게 정비하고, 간판과 햇빛 가리개도 바꿨다. 상인회는 정부에서 총 8억 5천억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김 회장은 “비가 많이 오면 손님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상점들 일부가 침수되기도 했죠. 이제는 비가 와도 끄떡없다”고 자랑했다.
시설도 개선되고 상인들끼리 결속력도 높아지니 요즘은 불황을 모를 정도다. 주택가와 지하철역(낙성대역) 근처에 위치한 지리적 장점까지 더해져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김 회장은 말했다.
그는 올해 고객센터 같은 소비자들의 편의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기에 젊은 사장들을 시장으로 끌어들여 상인의 세대교체도 이뤄가겠다고 했다.
“상인회장은 시장의 일꾼, 심부름꾼입니다.” 정치가의 공허한 공약이 아니라 동료상인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현장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