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총선거를 촉구하기 위한 민족대표자대회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1947년 7월, 이승만은 남한에서 자율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민의(民意)에 기반을 둔 정부수립운동 단체를 만들려고 했다.
       민의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과도입법의원에서 통과된 보통선거법에 따라 투표를 통해 단체를 조직함을 의미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국민회 조직을 이용해 7월 5일부터 몇 일간에 걸친 전국적인 선거에서 한국민족대표자(대의원) 200명을 선출했다.  그 선거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우익진영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민족대표자대회’는 밑으로부터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의원들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위로부터 선정된 대의원들로 구성된 국민의회와 달랐다.

       민족대표자들은 독립촉성국민회 회의실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참석한 가운데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열었다.
       그것은 과도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촉구하는 동시에, 앞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단체는 한국민족대표자대회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장에는 배은희, 부의장에는 명제세와 박순천이 뽑혔다.

       한국민족대표자대회는 조소앙이 의장으로 있는 국민의회와 통합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김구와 한독당이 남한의 자유총선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이승만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려고 했다. 그래서  1947년 9월 16일 국민의회의 주석 추대를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때 미 국무장관 마샬이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의 상정을 제안하는 연설을 했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우익진영은 전폭적으로 환영했다. 이승만은 그것을 계기로하여 남한의 자유총선거를 한층 더 강하게 주장했다.  뒤이어 한국민족대표자대회는 총선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위원회의 지방 대표들은 총선거일을 빨리 정해 줄 것을 미군정에 촉구했다.

       그리고 나서 우익진영의 71개 정당⦁사회단체는 1947년 9월부터 열리게 될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한국문제에 대해 발언할 한국민족대표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10월에는 마샬 제안의 달성을 기원하는 국민대회를 여는가 하면, 총선촉진국민대회도 열었다.

       11월에 이승만은 북한의 공산군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보도를 언급하면서 하루 바삐 정부를 세워 국방군을 조직해야 남한의 공산화를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때인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한총선거를 결의했다.
    사태는 이승만이 예견한 대로 진전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중에게 그 동안 미국정부는 어리석었고 이승만은 선지자 같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이승만의 자유총선거안을 반대한 세력들


       이승만 주도의 남한총선 관철 운동이 남한지역의 다수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방면에서 견제를 받았다.

       남한의 좌익들은 총선거가 분단을 영구화시키려는 음모라고 비난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 사수를 선언했다.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 소련군측 대표 스티코프를 통해 1948년초까지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를 제의했다. 이미 북한의 군사력을 키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북한정권은 스티코프의 제안을 지지하는 군중대회를 연달아 개최했다.

       놀라운 것은 그때쯤 해서 김구와 한독당이 이승만을 견제하는 세력에 가담하게 된 사실이었다.

    그것은 미국무부가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의 남한 총선거 추진을 억제하라고 지시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1947년 10월 15일 김구는 미군정 장관 브라운과 비밀회담을 가졌는 데, 그후부터 중도파와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김구는 마음 속으로 이승만의 민족대표자대회와 관계를 끊고, 조소앙의 남북협상론에 따라 ‘남북대표회의’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김구의 행동에 대해 근민당,조선공화당,사회민주당과 같은  중도좌파의 군소 정당들이 호응했다.
    그래서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좌익의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도 환영했다.

       1947년 11월 5일 김구의 한독당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한국에 올 것에 대비하여 근민당,민중동맹,사민당,신진당,청우당 등 10여개의 중도파 군소정당들과 합동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총선거 준비를 위해 미⦁소 양군을 즉시 철수시키고 남북정당대표자회의를 소집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구가 소련의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으로 태도를 바꾸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당황한 한민당 간부들은 김구를 찾아가 한독당이 우익진영으로부터 이탈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승만의 총선거 운동에 대한 가장 큰 견제 세력은 미 국무부였다.
       당시 미 국무부는 소련이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에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해 놓았으면서도, 이승만 주도의 남한총선거 관철투쟁을 억제한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미 국무부가 이승만을 싫어했다는 것은 다음의 경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민족 대표가 유엔총회에 참가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우익은 이승만을 선정하고 중도파는 김규식을 선정했을 때였다.
       미국의 유엔대표 오스틴은 과도입법의원만이 대표를 보낼 자격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는 데, 그것은 이승만을 거부하고 김규식을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미국에서 이승만을 괴롭혔던 교포들도 귀국


       해방이 되자 미국에서 이승만에 맞섰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인사들도 귀국해서 건국사업에 참여하려고 했다.
       그에 따라 1945년 8월 15일 전경무는 미 국무부와 전쟁부에  편지를 보내 영어통역 등의 방법으로 미군정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귀국 협조를 요청했다.
       미 국무부는 대환영이었다. 미국 정부에 맞서 왔던 이승만과는 달리, 그들은 샌프랜시스코 유엔창립총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 국무부에 늘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귀국이 동지회나 주미외교위원부의 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면, 그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따라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국 안의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미국정부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1945년 11월 4일 14명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들 가운데는 한시대, 김원용, 송종익,전경무,김호,정두옥 등이 있었다. 그리고는 하지 중장의 요청에 따라 정치,경제,문화,교통 등의 상황에 관한 조사에 착수했고, 12월에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서 그들은 모든 정치단체들이 김구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따라서 그 조사보고서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모든 정치세력을 통합하려는 이승만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임시정부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좌우합작이라는 공통점이었다.
    그 때문에 김구의 임시정부가 비상정치회의를 창설했을 때 한시대,김호,송종익이 참여했던 것이다.

    좌파와 손을 잡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


       그러나 비상정치회의가 비상국민회의로 이름이 바뀌고 28명의 최고정치위원이 미군정의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으로 임명되자, 김호 등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은 반발했다. 그 단체가 우경화하고 친미적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김구의 반탁총동원위원회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연합하여 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은 탈퇴했다. 그것은 이승만을 포함함으로써 우파 단체가 되었다는 이유에서 였다.

       임시정부 중심으로한 좌우통합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946년 4월부터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한시대,김호,전경무는 중도세력을 모아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했다. 미군정도 좌우합작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상황이 유리해질 듯이 보였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에 ‘정읍 발언’으로 남한의 과도 정부 수립을 촉구했을 때, 한시대는 통렬히 비판했다.
       그러므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은 자연스럽게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1946년 7월 도진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대표인 아놀드와 쉬티코프에게 메시지를 보내 좌우합작파인 김규식과 여운형을 돕도록 요청했다. 한시대는 좌우합작을 성공시키기 위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대중 강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미국의 한인 단체들로 하여금 김규식에게 격려의 전문을 보내도록 했다.
       그리고는 1946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유동열,김붕준 등을 끌어들여 신진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가저 오지 못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은 김호와 김원용만을 남기고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
       남은 두 사람은 하자 중장에 의해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임명되어 적산관리문제와 민족반역자특별법을 다루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입법의원에서 제정한 조선임시약헌과 민족반역자특별법이 1946년 11월에 미군정청에 의해 거부되자, 분개한 김호와 김원용은 남북협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1947년 5월에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자는 긴급 제안을 입법의원에 제출했다.
       김호는 신진당 대표로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발언할 23명 대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7년 9월 김호와 김원용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홍명희와 이극로의 중도파 통합운동에 가담하여 민주독립당을 결성했다. 그리고는 홍명희,이극로,박용희 등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주독립당은 당시의 좌익들처럼 자주적인 민족통일정부 수립과 미⦁소양군 철퇴를 요구했다.
       1947년 12월에 김규식을 중심으로한 중간파 정당의 연합 협의체로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김호와 김원용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8년 1월에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오게 되자, 더 이상 할 일이 없게된 그들은 즉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들은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