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각책임제 요소가 포함된 대통령중심제
  • ▲ 1948년 7월24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는 이승만.
    ▲ 1948년 7월24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는 이승만.

       국호가 정해지던 6월 9일,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새로 세워질 정부의 형태는 대통령중심제가 좋다고 말했다. 그것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촉성국민회 의원들은 대통령중심제에 동의했으나, 한민당과 무소속계 의원들은 내각책임제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6월 11일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로 결정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6월 15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도록 설득했다. 독립촉성국민회도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 중앙청청사(구 총독부청사)에서 열린 제헌국회.(1948.7)
    ▲ 중앙청청사(구 총독부청사)에서 열린 제헌국회.(1948.7)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한 것은 조선왕국의 멸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당파 싸움에 대한 나쁜 기억때문이었다.
       새 나라는 국민의 단합과 정치안정을 위해서는 어느 한 정당에 권력이 쏠리는 것을 막아야 하는 데, 그 위험성을 가진 것이 한민당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이 볼 때, 한민당은 자기를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세워놓고 실권을 쥐려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어떤 정부형태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승만과 한민당 가운데서 정국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민당계가 우세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자기네 계획대로 내각중심제가 포함된 헌법초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려고 했다.
       그러자 6월 21일 이승만은 다시 헌법기초위원회에 나타나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했다. 만일 내각책임제가 채택되면 자신은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고 야인으로 남아 국민운동이나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민당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이외의 마땅한 대통령 후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제헌헌법은 갑자기 대통령중심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내각책임제 요소가 상당히 많이 남게 되었다. 국무총리제를 두고 국회가 인준을 하도록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헌법초안은 국회 본회의로 넘겨져 6월 23일부터 7월 12일까지 토의가 진행되었다.
       당시 국회 안에는 크게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최대 세력은 60여명으로 이루어진 무소속구락부였다. 그것은 대체로 중도파와 좌파성향의 의원들로 이루어졌고 내각책임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두 번째 세력은 50여명의 의원들로 이루어진 3⦁1구락부였다. 그것은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출신의 의원들과 우파성향의 일부 무소속 의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해야 하지만 초대대통령만큼은 당시의 어려운 여건으로 보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세 번째 세력은 한민당으로 내각책임제를 주장했다.
  • ▲ 중앙청청사(구 총독부청사)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 왼쪽 단상에 초대국회의장 이승만.
    ▲ 중앙청청사(구 총독부청사)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 왼쪽 단상에 초대국회의장 이승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이와 같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3개 세력은 헌법기초위원회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7월 12일 1명의 반대를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제헌헌법이 통과되었다.
       헌법은 신생국 대한민국의 정체가 모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민주주의임을 명시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강했던 사회주의적인 사회분위기를  감안하여 경제⦁사회적 민주주의의 요소도 가미했다. 그래서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도 인정했다.

       헌법은  7월 17일 국회에서 공포되었다.
       그리고 국회는 7월 20일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아닌 다른 인물을 대통령에 선출되도록 공작했다.
    하지만 국민과 국회의원들이 워낙 강력하게 이승만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작은 먹혀 들지 않았다.
       196명의 출석의원 가운데서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것은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 1표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이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2차까지 가는 투표에서 이시영이 133표를 얻어 62표를 얻은 김구를 앞섬으로써 당선되었다.
  • ▲ 1948년 8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건국내각을 구성한 이화장내 외딴 집. 그후 '조각당(組閣堂)'으로 이름 붙여지고 현판도 달았다.(아래)
    ▲ 1948년 8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건국내각을 구성한 이화장내 외딴 집. 그후 '조각당(組閣堂)'으로 이름 붙여지고 현판도 달았다.(아래)

  • ▲ 1948년 8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건국내각을 구성한 이화장내 외딴 집. 그후 '조각당(組閣堂)'으로 이름 붙여지고 현판도 달았다.(아래)

       1948년 7월 24일, 구슬비 내리는 중앙청 광장에서 73세의 노인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여러번 죽었던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아 감격스럽기도 하고 책임감으로 두려운 생각도 든다는 말로 취임사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새 나라 건설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부패한 예전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새 길을 찾아 분발해야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문명국들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경고했다. 우리 조국을 소련의 종노릇 시키기 위해 반역 행동을 하게 되면, 온 겨례가 원수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건국세력의 분열

       정부수립국민축하대회, 즉 정부수립 선포식을 8월 15일로 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내각을 구성해야 했다.
       무엇보다 국무총리 임명이 급했다.
       국무총리 후보로 한민당은 김성수, 독립촉성국민회는 신익희, 한독당과 좌파 성향의 무소속 세력은 조소앙을 밀었다.
  • ▲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한민당 당수 인촌 김성수의 동상.(고려대구내)
    ▲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한민당 당수 인촌 김성수의 동상.(고려대구내)

  • ▲ 동아일보 사주인 인촌 김성수는 건국내각에서 한민당이 홀대받자 이승만정권에 반대세력이 되었다.
    ▲ 동아일보 사주인 인촌 김성수는 건국내각에서 한민당이 홀대받자 이승만정권에 반대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북한에서 월남한 이윤영 목사를 지명했다.
    이윤영은 지역적,당파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이익을 앞세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북한동포를 배려한다는 홍보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윤영은 국회에서 인준을 받는 데 실패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두 번째 후보로 이범석을 추천했다. 그에 대해서도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이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부하면, 정부수립선포일이 가까워 오고 있는 데다가, 건국초기부터 정치적 위기를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국회는 그를 인준해주었다.
       그에 따라 8월 4일까지 모든 각료가 임명될 수 있었다. 새 나라의 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건국에 공로가 컸던 한민당은 자기 정당에 배정된 각료가 김도연 재무장관 1명 뿐인데 대해 크게 실망해 있었다. 따라서 그 당수인 김성수는 야당으로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세력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것은 건국세력이 분열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신생국의 앞길을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