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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수의 크리에이티브 산책] 국가 정상이나 외교관들이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외교적 수사'는 완곡하고 정중해야 한다는 한계 때문에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살아가는 우리 일반인들이 보기에 일종의 수수께끼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이 어느 나라를 '우리의 가장 가까운 우방 중 하나'라고 칭했다면 그건 '악의 축'에 해당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양국이 현안에 대해 충분히 토의했다'는 건 '합의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귀국의 결정에 대해 깊은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고 했다면 '완전히 열 받았다'는 뜻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외교 역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활동이지 보편적이며 국제적인 정의실현 같이 거창한 걸 구현하기 위한 게 아니다. 완곡하고 정중한 외교적 수사는 바로 그런 국가적 이기심을 우아하게 포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 구제기금을 떠안으라는 압박에 시달리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얼마나 난처한 입장에 놓였을 지 짐작해볼 수 있다. 어려움에 처한 유럽연합의 '친구 나라'인 그리스는 빠른 시일 내 회복할 기미도 노력도 보이지 않는데 IMF는 자꾸만 '어려움을 함께 나누자'고 한다.
유럽연합 회원국이자 공업수출국으로서 2008년 국제금융위기 이후 되려 이득도 좀 본 독일로선 대놓고 거절하기 난처하다.
2013년 유로베스트 필름 부문에서 동상을 탄 '간호사 메르켈'은 바로 그런 독일의 입장과 외교적 수사의 난해함을 통해 신문의 기능을 강조한 광고다. 광고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그리스 순방을 소재로 삼았다. 비행기에서 막 내린 메르켈이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한다.
"저는 그리스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메르켈의 껍데기가 벗겨지며 자상한 미소의 간호사가 나타난다. 그리스 대통령 파풀리아스는 링거 병을 든 나약한 환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메르켈이 이어 "하지만 우리는 이 어려움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때 메르켈의 껍데기가 또 한 꺼풀 벗겨지며 톱을 든 냉정한 외과의사가 나타난다.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말할 때 메르켈은 전기톱을 든 외과의사의 모습이다. 환자 파풀리아스는 체념한 표정이 된다.메르켈과 같이 뉴스의 초점이 된 사람이 타국에서 그것도 전세계 외신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그 나라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얘기하기란 쉽지 않다. 2012년 실제 메르켈이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긴축정책을 요구하는 독일에게 항의하며 거세게 시위했다.
당시 메르켈의 한 마디는 향후 그리스와 유럽, 더 나아가 전세계 경제상황을 예측하게 만드는 열쇠였다. 하지만 독일이 펼쳐나가는 정책을 보고 메르켈의 진의를 파악하려면 너무 늦다. 광고는 이런 난해한 외교적 수사를 이해하려면 스위스의 독일어 신문인 '일요신문(Sonntagszeitung)'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제 독일과 그리스 관계를 재치있게 이용한 이 광고는 스위스의 존탁스자이퉁Sonntagszeitung이 광고주로, 스위스의 아드비코 영앤루비캠 취리히(ADVICO Y&R)가 대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