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칸 라이언즈 필름 크래프트 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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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수의 크리에이티브 산책] 불이 인류 문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묻는다면 사람들은 흔히 제철기술과 같이 거창한 것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불은 그보다 훨씬 더 일상적인 데서 이용되기 시작했다. '요리'가 바로 그 중 하나이다.
처음 단순한 '굽기'에서 시작된 요리는 이후 도기와 철기 등 '그릇'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삶기, 찌기, 볶기 등으로 세분되었지만, 열을 가해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현대인들은 화학시간에서 배웠던 갖가지 반응을 부엌에서 매일처럼 실험하면서도 그게 얼마나 짜릿하고 신나는 경험인지 잊어버렸다. 즉석요리나 배달음식이 인기를 누리는 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때문에 영국의 버터 브랜드인 루팍(Lurpak)은 광고에서 항상 요리를 멋지고 신나는 경험으로 묘사해왔다. 사람들이 요리를 지루하다고 생각한다면 서양요리의 기본 식자재인 버터가 잘 팔릴 리 없기 때문이다. 루팍은 요리를 미술에 빗대는가 하면, 부엌을 대장간으로 빗대는 등 '세계 최악의 요리사들'로 꼽히는 영국인들에게 다채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왔다.
이번 칸 라이언즈 크리에이티비티 페스티벌(칸 국제광고제) 필름 크래프트 부문에서 두 개의 금상을 차지한 '요리사의 렌지(Cook’s Range)'도 마찬가지. 이 필름에서 루팍은 조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태양계 천체들에 빗댔다.
무리한 비유는 아니다. 규모가 좀 커서 그렇지, 행성 표면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가 온갖 복잡한 고분자 유기물로 이뤄진 식자재의 화학적 변화에 비해 더 복잡할 것도 없다. 게다가 클로즈업한 양배추와 브로콜리, 생강과 석류, 호박과 달걀은 태양열이나 운석, 혹은 조석력이나 지열에너지 때문에 이리저리 얽히고 일그러진 소행성이나 행성의 표면이나 대기의 모습을 닮았다.
붉은 양배추에 조명이 비치며 시작되는 R. 슈트라우스의 '차라투라투스는 이렇게 말했다'부터 시작, 이 필름 광고는 시종일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서두 부분을 패러디한다. 지구나 달 대신 이런저런 식자재가 등장할 뿐, 카메라 앵글과 효과음마저 영락없는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거대한 돌기둥이 지구인들에게 문명의 씨앗을 던져줘서 마침내 인간들로 하여금 목성(영화에서는 목성이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토성이다)까지 이르게 했던 것처럼, 부엌에 던져진 불씨는 녹말 입자에 수화(水化)를 일으키고, 단백질 분자의 수소결합과 황-황 결합을 끊으며, 지방에 환원반응을 일으키는 등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변화를 일으킨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던져준 대가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고 인간은 죽을 때까지 부엌에서 요리와 설거지를 반복하는 형벌(?)을 받게 됐다. 다만 부엌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칫하면 요리의 매력에 푹 빠져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일 수 있다는 점, 루팍은 바로 그걸 노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