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대서양 누빈 순직 선원 유골 327기 중 4기만 40년 만에 고국 품에퇴색한 가족애·이장비용 부담·사회적 관심과 홍보 부족 등 다양한 이유
  • ▲ 지난 4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금봉201호 선원으로 원양어업에 나섰다가 순직해 스페인 라스팔마스 선원묘지에 안장됐던 고(故) 김용택씨의 유해가 도착해 김씨의 동생 김용만씨(오른쪽)가 유골함을 전달받은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연합뉴스
    ▲ 지난 4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금봉201호 선원으로 원양어업에 나섰다가 순직해 스페인 라스팔마스 선원묘지에 안장됐던 고(故) 김용택씨의 유해가 도착해 김씨의 동생 김용만씨(오른쪽)가 유골함을 전달받은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연합뉴스

    돈을 벌고자 이역만리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숨진 원양 선원들의 유골을 고국 땅에 안치하기 위한 유가족들의 신청이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들을 1970년대 경제 역군으로 보고 이들의 노고를 잊지 않으려 국내 이장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유가족 신청은 저조한 실정이다.

    이장비용 부담 등 경제적인 사정과 이들의 순직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 귀환과는 다르다는 점, 1만여㎞ 떨어진 거리와 수십 년의 세월이 가족애의 끈끈함을 희석시켰다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사업비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양수산부는 1970년대 오대양을 누비다 순직해 이역만리에 묻혔던 원양 선원의 유골 4위(位)가 4일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와 국내 유가족에게 인계됐다고 5일 밝혔다.

    40년 만에 가족 품에 돌아온 유골은 1970년대 스페인 라스팔마스 어업기지를 중심으로 서부 아프리카 등 대서양에서 원양어선 조업활동을 하다가 현지에서 순직한 선원들이다.

    라스팔마스에는 1966년 한국수산개발공사를 시작으로 국내 민간기업이 대거 진출했다. 1970년대 말 수산회사 45개, 트롤선 120여척, 참치연승어선 80척이 대서양에서 활약했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원양 선원들은 경제 역군으로 활약했다. 라스팔마스 선단은 1966~1987년 21년간 모두 8억7000만 달러(약 1조원)를 벌어 한국에 보냈다.

    '원양어선을 타면 돈을 번다'는 소문이 나면서 당시 선원 지원자가 줄을 이었지만, 조업 경험 부족과 안전 수칙 미준수 등으로 20대 젊은 나이에 조업 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해수부는 2002년부터 스페인·사모아·피지 등 7개 나라에 묻힌 총 327기의 우리나라 원양 선원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

    원양 선원 국내 이장 지원사업은 한국원양산업협회를 통해 지난해부터 시작했다. 지난해 최초로 스페인에서 1기의 선원 묘지가 국내로 이장됐다.

  • ▲ 1일(현지시각) 스페인 라스팔마스 공동묘지 내 한국인선원 납골당에서 유골 4위를 모셔오는 모습.ⓒ해수부
    ▲ 1일(현지시각) 스페인 라스팔마스 공동묘지 내 한국인선원 납골당에서 유골 4위를 모셔오는 모습.ⓒ해수부

    이장 지원사업은 유가족 신청에 의해 이뤄진다. 그러나 신청은 저조하다. 올해까지 2년간 총 5건이 접수된 게 전부다.

    해수부 관계자는 "관련 예산이 적지만, 지금까지 신청분에 대해선 전부 지원했다"고 말했다.

    국내 이장 신청이 낮은 이유로는 여러 의견이 제기된다. 이장비용 등 유가족의 경제적 부담도 하나의 이유로 꼽힌다. 유골은 해수부가 현지 국가의 이장절차에 따라 시신을 수습한 뒤 국내로 들여오면 이후는 유가족이 인계받아 안치한다. 별도의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애가 퇴색했다는 의견도 나온다. 돈을 벌기 위해 이역만리로 배를 타고 나간 젊은 가장이 현지에서 순직한 사이 고국의 어린 자녀는 자라 성인이 됐지만, 부성애를 느껴보지 못했거나 아버지의 부재를 당연시하게 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이장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이들의 순직에 관한 사회적 시선이나 관심이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희생자 등과 다른 것도 원인으로 분석된다. 강제노동 희생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국의 각종 건설사업에 강제 투입됐다가 숨졌다. 반면 원양 선원들의 순직은 자발적인 경제활동 참여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정부는 뒤늦게 이들을 경제 역군으로 묘사했지만, 사회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보니 유가족이 느끼는 자긍심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견해다.

    정부의 사업비가 생색내기 수준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사업과 관련한 해수부의 올해 예산은 9500만원쯤이다. 이 예산에는 외국 7개국에 있는 원양 선원의 묘지를 관리하는 비용도 포함된다.

    특히 사업 홍보비는 턱없이 부족하다. 해수부는 전광판과 언론 매체, 관련 기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사업을 홍보하고 유가족들의 신청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업을 위탁받아 추진하는 원양산업협회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주로 수산 관련 전문지나 부산지역의 방송자막을 통해 사업을 홍보했다. 올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중앙언론매체를 활용한 홍보활동은 중앙지 1곳에 단 1회 광고를 게재했을 뿐이다.

    해수부 한 관계자는 "전광판을 활용한 사업홍보도 병행하는 것으로 아는데 솔직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사업 홍보가 중요한 이유는 유가족 동의와 신청 없이 정부가 멋대로 사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해수부 관계자는 "당시 선원수첩을 발급했으므로 순직한 원양 선원과 관련한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만 유가족마다 처지가 다를 수 있어 정부가 독단적으로 국내 이장을 추진하기도 어렵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