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룰 시행령 개정 꼼수, 700조 국민 돈으로 기업 옥죄기정권 입맞대로 '코드 투자' 우려… 위헌 요소 많아국회 논의 원천차단… 답답한 재계, 하소연 할 곳도 없어
  • [편집자 주]지난달 25일 국회 정무위 회의실에 일순간 적막이 돌았다. 여야가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논의하는 가운데 한국당 간사인 김종석 의원이 "매우 유감스럽다"며 퇴장했다. 김 의원은 "법안 심사한다고 무슨 소용이냐"며 "여기서 통과되지 않으면 또 시행령으로 개정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정부의 국회 패싱이 도를 넘고 있다. 조국 사태 이후 정부와 야당의 소통채널이 단절되면서 법안심사를 통한 법개정보다 정부 독단으로 의결 가능한 시행령 개정이라는 꼼수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이다. 야당은 '법위에 시행령'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정부와 청와대는 점점 귀를 닫고 있다. 국회 본청 3층에 위치한 청와대 정무수석실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은 텅텅 비어있을때도 많다.

    정부가 주로 시행령 개정이란 꼼수를 활용하는 부문은 민간기업을 규제하고 감독하는 영역을 넓히는 쪽이다. 공정경제로 내세운 정부 기조가 정권 중반을 지나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자 막무가내로 규제를 강화하려는 속셈이다. 재계는 민의의 공간인 국회 논의가 사라지자 답답함을 토로한다. 정부 행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원천 차단되는 셈이다.

    헌법 126조는 천재지변 등 긴급한 사안을 제외하고 사영기업의 경영을 국가가 통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시행령 개정을 통한 기업 옥죄기는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의 과도한 직권남용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이 여당 의원들과 웃으면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이 여당 의원들과 웃으면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5%룰 완화 꼼수… 정부, 700조 기금 내세워 기업 사냥

    정부의 시행령 개정 꼼수의 대표적 사례는 국민연금 5%룰 개정안이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투자자가 5% 이상 기업 지분을 보유하거나 이후 1% 이상 지분 변동이 생길 경우 5일 이내에 관계당국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다만 경영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 목적, 즉 단순투자의 경우 약식보고를 하면 된다.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5일 5%룰을 적용받던 기관투자자의 보고 및 공시의무를 완화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골자는 공적연기금의 보고 의무 완화다. 공적연기금은 경영목적을 위한 지분 투자라고 하더라도 약식보고만 하면 되도록 했다. 또 지분을 가진 공적연기금이 정관 변경 요구를 하거나 임원의 해임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을 경영개입 행위에서 제외시켰다.

    당장 재계는 반발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5%룰 완화에 대해 "투자자의 경영 개입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범위를 축소해 기업의 경영권 안정성을 훼손하고 있다"며 금융위에 백지화 요구를 전달했다.

    한국상장사협회도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민연금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집중투표제 도입과 같은 정관 변경 주주제안과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등을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700조원에 이르는 국민연금기금이 기업에 투자되고 이를 통한 경영권 간섭이 적극 이뤄지면 제2, 제3 한진가 사태는 더욱 자주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공단 인사권을 가진 정권이 입맛대로 기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국민연금이 5% 이상 주식을 보유한 상장사는 300개가 넘는다. 국민연금은 최근 정부 기조에 맞춰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주식을 대거 사들이기도 했다. 국민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안정성이나 수익률 보다 정권의 코드 맞추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김종석 한국당 의원은 "국민연금은 그동안 KB금융 노동이사제를 추천한다거나 멀쩡한 회사의 대주주 가족이 갑질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대주주를 교체하려 하는 등 순순하게 국민의 이익을 대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국민연금의 의사결정구조와 지배구조가 선진화되지 않았는데, 5%룰 완화라는 혜택까지 줘서 사회정책적인 고려를 반영하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 ▲ 국민연금기금 2018년 운용현황ⓒ국회예산정책처
    ▲ 국민연금기금 2018년 운용현황ⓒ국회예산정책처
    막무가내 시행령 개정… 허수아비 상위법

    한국당은 정부의 5% 룰 시행령 개정을 막기 위해 상위법인 자본시장법 개정에 나섰다.

    김 의원 등 한국당 의원 11명은 지난달 15일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출했다.

    자본시장법 147조 1항에 명문화된 5%룰 부칙에 규정된 '전문투자자 중 보고내용 및 보고시기 등을 대통령령으로 달리 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삭제한 개정안이다.

    또 2항을 추가해 정권 변경이나 회사나 임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동을 '경영권 참여'로 규정했다.

    개정 법률은 "금융위원회의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 계획은 정부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채택한 국민연금 및 기관투자자들에게 공시의무 위반에 대한 부담을 대폭 덜어주어 이들의 주주권 행사를 적극 활성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지적한다.

    발의에 참여한 의원들은 "IMF 외환위기 당시 외화 유치를 위해 우리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을 대폭 제거한 상황에서, 5%룰이 그나마 투기 목적의 자금 유입을 차단하는 간접적인 경영권 방어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또 "정부 계획대로 시행령이 개정될 경우 주식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손이자 정부 영향력 하에 있는 국민연금이 보유 주식을 활용해 주주권을 행사함으로써, 관치 논란과 연금 사회주의 논란을 불러올 것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자본시장과 기업 경영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제도의 변경을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법률 개정으로 완성하지 않고 정부가 임의로 시행령을 개정하여 도입하는 것은 심각한 법체계 훼손"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