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은. 이창용 한은 총재가 25일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회의 후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20230526.
    ▲ ⓒ한은. 이창용 한은 총재가 25일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회의 후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20230526.
    "구조개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으로 해결하라고 하면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5월 금리동결 발표 후 작심발언을 쏟아냈다.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한은 총재가 정말 이런 발언을 했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존 총재에게서는 들어볼 수 없었던, 속 시원하고 파격적인 내용들이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다. (노동, 연금, 교육 등의 분야에서)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타협이 너무 어려워 진척이 안 되고 있는 것, 특히 혜택을 보는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 중심으로 모든 논의가 많이 되고 있는 것, 이런 문제 때문에 지금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여기까지는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내놓는 중앙은행의 수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이 총재는 한 발, 아니 여러 발 더 나갔다.

    "고3 때 자기가 평생 해야 할 전공을 정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연금개혁에서 모수 빼고 얘기하는 것은 하지 말자는 얘기"
    "의료산업 국제화 한 걸음도 못 가는 사이에 태국, 싱가포르에 밀렸다."

    개혁의 필요성에 그치지 않고, 개혁의 방향성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것도 사석이 아니라 온 국민이 보고 있는 기자회견장에서. 역으로 비유를 해보면 교육부(노동부·복지부) 장관이 공식 석상에서 한은의 금리정책에 대해 올려라, 내려라 훈수를 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비전문가가 전문가 행세를 하면 각종 오류를 낳기 마련이다. 고3 때 평생 전공을 정하는 건 이 총재가 학교 다닐 때 얘기다. 이미 많은 대학들이 2000년대 후반부터 자유전공 학부제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연금개혁에서 모수개혁 빼고 구조개혁부터 하자는 얘기는,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라 풀기 쉬운 문제부터 먼저 접근하자는 얘기일 수도 있다. 의료산업 국제화는 이 총재 눈에는 미진해 보일지 몰라도 업계에서는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성과를 내고 있는 이슈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환자수는 유치가 허용된 2009년 이래 꾸준히 증가세를 보여 2019년에는 50만명에 육박한 바 있다.

    때마침 추경호 경제부총리도 한 행사장에서 "물가안정 기조를 확고히 하면서 노동·연금·교육개혁을 강도높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마치 경제부총리와 한은 총재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이 같은 날, 같은 주제를 강조한 것이다. 나라 경제를 책임진 수장들로서만 보면 '원팀'의 모습을 보여주며 탄탄한 팀워크를 발휘한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그렇게 가볍게 지나칠 사안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경제 분야에서 못마땅해 하는 노동·연금·교육개혁은 모두 사회부총리 관할 이슈다. 교육부 장관을 겸하는 사회부총리 자리는 윤석열 정부 출범 당시 김인철 후보자 낙마, 박순애 부총리 경질 사태를 겪으며 우여곡절 끝에 이주호 전 장관이 맡았다. 주지하다시피 여소야대 국면에서 노동·연금·교육개혁은 기대가 난망일 수밖에 없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에 가깝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수장이 마음만 먹으면 좌지우지 할 수 있지만 구조개혁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의 경제팀이 사회팀을 채찍질(?)하는 이 상황을 국민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성과가 미진하니 갈아치워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갈아치운다면 대안은 있는 걸까. 능력 있고 청렴해서 인사청문회 걱정 없는 인사들이 줄을 서 있는 걸까. 아니면 대통령에게 무능한 인사의 교체 결단을 촉구하는 걸까.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실 개편과 개각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경제팀의 사회팀 책망은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한 내부 권력다툼으로 비춰질 여지가 다분하다. 경제만 놓고 보면 '원팀'일지 몰라도, 국무 전체적으로 보면 '두팀'이 싸우는 모양새밖에 안 된다. 또 한편, 잠재성장률 하락의 책임에서 과연 경제팀은 자유로울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이창용 총재도 스스로 언급했듯이,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경제 주체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두 배, 세 배로 뛴 이자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기업인들과 서민들이 부지기수다. 이 총재는 나라 걱정에 울분을 토했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울분도 좀 헤아려주길 바란다. 국민들은 경제 원팀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 원팀, 더 나아가 대한민국 원팀을 보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