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라이언즈 2023] 서울라이터의 칸 라이언즈 탐방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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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맞는 네 번째 아침, 과장 한 꼬집 보태면 4일째가 되니 40년은 칸에 산 사람처럼 모든 것이 익숙해졌다. 모닝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 거리도 윤슬이 반짝이는 해변의 풍경도 일상의 단편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나 홀로 정한 주제는 크리에이티비티! 칸 라이언즈가 전 세계 크리에이터들의 축제인 만큼 오늘은 크리에이티비티라는 보다 본질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영감을 찾아 보기로 한다.첫번째 세션은 혁신적인 광고회사로 영국 광고계를 이끌었던 사치 앤드 사치(Saatchi & Saatchi)가 소개하는 뉴 크리에이터스 쇼케이스(New Creators Showcase)다. 올해로 33년을 맞이한 쇼케이스는 신진 크리에이터를 위한 플랫폼을 통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크리에이터들을 소개하는 칸 라이언즈의 상징적인 세션이다.올해는 총 10명의 크리에이터가 선정됐고,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이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스꽝스러운 운전 연수 첫 날의 상황을 코믹하게 담은 '플로렌스 윈터 힐(FLORENCE WINTER HILL)',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며 달리는 역동적인 기법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일리미떼월드(ILLIMITÉWORLD)', 이란 출신의 애니메이션 및 영화 감독으로 아빠를 냉장고에 엄마를 세탁기에 비유해 기막힌 상상력을 보여준 '마부베 칼라이(MAHBOOBEH KALAEE)', 대담한 코미디로 객석에서 큰 웃음을 유발한 ‘'아서 스터드홀름(Arthur Studholme)' 등이다. 상영된 10개의 작품은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주제와 연출로 각기 다른 색깔을 만들어 냈다. 동시대를 사는 비슷한 연령대의 크리에이터들이 이렇게나 다른 작품을 만들 수 있구나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교차했다. 선정된 작품은 웹사이트(클릭)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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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세션 역시 전통적으로 유명한 광고회사의 세션으로 골랐다. 한국에도 지사를 두고 있는 BBDO 월드와이드의 세션 'Why We Need To Make People Laugh(왜 우리는 사람들을 웃게 해야 하는가)'가 세션의 주제였다. 연사는 BBDO의 사장 겸 CEO인 앤드류 로버트슨(Andrew Robertson), 다행히 사장님 말씀처럼 딱딱하고 격식을 따지는 자리는 아니었다. 세련된 스탠드업 코미디처럼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쉴 새 없이 웃게 만드는 즐거운 세션이었다.앤드류 CEO는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유머를 일깨워 비즈니스에 좋은 결과를 이끌자는 주제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개했다. 특히 주장을 뒷받침하는 매력적인 데이터를 제시함으로써 자칫 가볍게 흘러갈 수 있는 내용에 묵직한 힘을 실었다.발표에 따르면 2002년 이후로 유머 광고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 2022년 칸 라이언즈에서 수상한 골드 및 그랑프리 수상작 10개 중 단 1개 정도가 유머를 이용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수년간의 팬데믹을 거치면서 유머광고는 기세를 잃었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상은 너무 심각해지고 진지해진 것이다.제시한 데이터에 따르면 유머 광고는 90% 더 기억할만하고, 80% 더 추천되며 91% 더 호감가고, 72% 더 설득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광고를 더 즐기고 더 많이 공유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유머는 캠페인의 경제적 성과를 달성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팬데믹 이후 찾아온 경제위기로 전 세계 불행 지수가 점차 높아지는 요즘, 브랜드가 캠페인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려면 사람들을 더 많이 웃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팬데믹 기간에 희망적인 유머 메시지를 전한 엑스트라 껌 광고
- 영화가 올드해지기 전에 지금 보라는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카날+광고
-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잠시 잊고 있었다. 유머의 힘을! 유머 광고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말이다.마케팅 방식이 다양해지고 제작해야 할 콘텐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영상이 아니면 유머를 전달하기 힘들다는 편견이 생겨났고 자연히 유머는 잊혀졌다. 하지만 앤드류 CEO는 요즘 각광 받는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도, 이커머스도, Gen-Z마케팅도, 심지어 AI 생성 콘텐츠에도 유머는 녹여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이사이 웃음을 유발하는 흥미로운 사례를 양념처럼 곁들이면서 말이다.모두가 신기술, 유행하는 마케팅에 눈을 돌리는 요즘,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검증을 마친 셀링 포인트 '유머'는 그 가치가 홀대 받은 게 아닐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의미있는 세션이었다.출품작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The Work'에서 다양한 카테고리의 쇼트리스트를 감상한 뒤, 신선한 바람을 쐬러 밖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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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션은 NIKKEI가 주최한 '사운드 오브 크리에이티비티(Sound of Creativity)'라는 제목의 음악 세션이었다. 뮤지션 테츠야 코무로가 테라스 스테이지에서 45분간 라이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첫 인사를 제외하고 뮤지션과 관중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없었지만, 음악이라는 언어를 통해 전 세계 누구와도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시간이었다.테츠야 코무로는 일본의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40년 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혁신적인 음악을 연마해 온 장인이라고 한다. 그는 여러 대의 신디사이저를 활용해 아름답고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 음악과 함께 화면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다.'An eternal echo, an unfolding illusion(영원한 메아리, 펼쳐지는 환상)', 'Like the grains of sand on the shore, trembling and shining(해안가의 모래알처럼 떨리고 빛나는..)' 같은 싯구 같은 문장들은 알고 보니 AI가 그의 음악을 기반으로 자동 생성하는 문장들이었다. 음악과 어우러져 더 완벽한 무대를 만들었던 문장들이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 만든 것이라니…카피라이터인 나를 한 번 더 좌절에 빠뜨리는 순간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곡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를 기리며 만든 곡이었다. 특히 이 곡에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딸이 보컬로 참여해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음악은 음악에게, 크리에이터는 크리에이터에게 각자의 영감을 릴레이하는 것이 어쩌면 작은 진보가 아닐까 생각했다.100여개 국가의 크리에이터들이 참여하는 칸 라이언즈에서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 독특한 배경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을 수없이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독창성을 요구 받는 광고 출품작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런 아이디어를 내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성장 배경에서 자라온걸까 궁금해지곤 한다. 차이는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 만일 이 크리에이터들이 한국에서 일한다면 결과물은 어떻게 달라질까. 반대로 내가 다른 나라에서 일했다면 무엇이 바뀌었을까.다양성은 이번 칸 라이언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덕목이다. 다양성이란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다. 또한 내 스스로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모든 크리에이티비티의 원천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다채로운 경험, 남다른 시도, 색다른 스토리텔링이 나를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성을 내재한 나로 만들어준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위해 내 안의 수많은 나의 다양성을 성장시키는 것. 그것에서부터 크리에이티비티는 시작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