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출신 구로구청장 사퇴… 백지신탁제도 실효성 논란공직 신뢰도 높였지만 기업인 공직 진출 저해 지적韓 신탁시 처분 의무지만 美 수탁사 통한 관리전문가들 "백지신탁제도, 시대 변화에 맞춰 개편해야"
  • ▲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개최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 유세에서 단상에 올라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개최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 유세에서 단상에 올라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기업인 출신 문헌일 구로구청장이 자진 사퇴하며 백지신탁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백지신탁제도는 그동안 공직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왔지만 정부나 정치권에 입문하려는 기업인들에게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우리 경제 곳곳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 안의 인재를 폭넓게 기용하기 위해 백지신탁제도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제언한다.

    28일 정치권에 따르면 문헌일 전 서울 구로구청장은 지난달 주식 백지신탁을 거부하며 전격 사퇴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주식 백지신탁을 사유로 물러난 것은 이례적이다. 문 전 구청장은 본인이 창업한 문엔지니어링 주식 4만8000주(평가액 170억원대)에 대해 백지신탁을 하라는 결정에 불복해 소송까지 진행했으나 재판에서 패소하자 결국 사퇴한 것이다.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된 백지신탁제도는 직무와 관련이 있는 주식을 3000만원 이상 보유하는 고위 공직자는 임명 두 달 이내(60일)에 주식을 매각하거나 수탁 기관에 처분을 일임하는 백지신탁을 해야 한다. 공직자가 재임 기간 중 자기 재산의 관리와 처분을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직위나 직무로 인해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 주식 거래를 하거나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막겠다는 취지다.

    신탁이라고 하지만 주식을 많이 보유한 기업인들이 공직에 입문하려면 경영권이나 자산을 사실상 포기해야 되면서 기업인 출신이 공직 진출을 꺼리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2013년 중소기업청장으로 내정됐던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는 백지신탁에 대한 부담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다. 실제로 정부 경제팀의 핵심 부처인 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 등에는 기업인 출신이 임명된 적이 없다.
  • ▲ 여의도 증권가 ⓒ정상윤 기자
    ▲ 여의도 증권가 ⓒ정상윤 기자
    우리와 달리 미국은 기업인 출신 고위 공직자들이 많다. 미국의 백지신탁제도에서는 수탁자가 신탁 재산의 관리와 운용에 폭넓은 재량을 가지며 일정 기한 내에 재산을 전부 처분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내년 1월 출범하는 트럼프 신정부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를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임명했기도 했다. 더욱이 미국 정부효율부가 내각 조직이 아닌 독립적인 정부 자문기구로서 활동할 경우 머스크는 주식 백지신탁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이다.

    머스크뿐만 아니라 각종 사업과 주식 보유 등으로 1조원대 재산이 넘는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대거 지명됐다. 월가의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스콧 베센트은 재무장관 지명자로 지명됐다. 또 프로레슬링 WWE(월드레슬링엔터테인먼트)를 남편과 함께 설립한 사업가 출신인 린다 맥맨은 교육장관으로 발탁됐다.

    트럼프 신정부의 내각 주요 후보자들의 재산을 합하면 약 130억달러(약 18조원)를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머스크의 재산까지 모두 합칠 경우 전체 재산은 500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의 재산 총합은 세계 경제 규모에서 중위권에 속하는 덴마크·남아프리카공화국·콜롬비아 등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다. 

    트럼프 신정부에 앞서 빌 클린턴 행정부 때도 로버트 루빈 골드만삭스 회장이 재무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도 행크 폴슨 전 골드만삭스 공동 CEO를 재무장관으로 발탁됐다.

    전문가들은 백지신탁제도가 2005년 도입된 이후 큰 변화 없이 20년 가까이 운영되면서 시대에 맞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부동산 가상자산·백지신탁제도 도입의 전제조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백지신탁제도는 공직자의 재산이 일률적으로 매각되도록 하는 바, 공직자의 재산권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는 비판을 낳고 있다"면서 "백지신탁제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먼저 재산의 일률적인 매각을 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편하여 제도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제학과 교수는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시점에 어떤 사람이 주식이 있다고 해서 이 권력을 자기 사적 이익을 위해서 마구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무자들도 있고 언론 감시도 있고 시민단체도 있다"면서 "일론 머스크가 미국에서 어떤 정책을 쓰는데 테슬라나 자기 주식 주가를 올리려는 쪽으로 다 쓴다면 그게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겠냐"고 언급했다.

    이어 "사회는 정보가 공개되고 서로 견제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했을 때 처벌하면 되는데 사전에 백지신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능력 있는 기업인들이 정치나 공공 부문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막는 것"이라면서 "현재의 제도는 경영권 행사를 못하게 할 뿐, 이해 충돌을 막아주는 제도는 아니다"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