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에 유조선 발 묶여 … 정유·석화 공장 가동률 하락전기료·물류비 동반 상승 … 반도체 등 제조업 수익성 압박고유가發 인플레이션 확산 … 글로벌 수요 둔화 '이중 충격'
-
- ▲ 호르무즈 해협에서 대형 컨테이너선 등이 항해하고 있다. ⓒ뉴시스
중동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산업계 전반에 '원가 쇼크'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항공·정유·석유화학 등 유가 민감 업종은 물론 전력 사용량이 많은 반도체·제조업까지 물류비와 전기료가 동반 상승하며 수익성 압박이 확대되는 모습이다.9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에 공급될 유조선 7척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 묶여 있는 상태다. 선박 한 척당 최대 200만 배럴을 실을 수 있어 일주일치 국내 소비 물량이 사실상 발이 묶인 셈이다.정유업계는 미국과 브라질 등 중동 외 지역에서 대체 원유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설비 공정 특성상 다른 지역 원유를 대량 도입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정유시설 가동률을 낮출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유시설 가동률이 낮아지면 휘발유와 경유 공급량이 줄어 추가적인 유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석유화학 업계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원유 가격 상승은 석유화학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동시에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실제 중동 사태 이후 나프타 가격은 약 20% 급등했다.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시설을 운영하는 여천NCC는 최근 주요 고객사에 제품 공급 지연 가능성을 통보하고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나프타 수입이 지연된 데 따른 조치다.여천NCC는 연간 229만t 규모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공장 가동률을 최소 수준으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롯데케미칼, LG화학, 대한유화 등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도 원가 상승과 원료 수급 불안에 대응해 공장 가동률을 낮추거나 정기보수 일정을 앞당기는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ICIS는 국내 나프타 분해시설(NCC) 가동률이 지난달 80%에서 이달 69%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에너지 가격 상승은 전력 비용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가동되는 특성상 전력 사용량이 막대한 산업이다. LNG 발전이 국내 전체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기준 28.1%에 달하는데 LNG 가격은 원유 가격과 연동되는 구조다. 한국과 일본의 LNG 가격 지표인 JKM 선물 가격은 전쟁 발생 이후 일주일 만에 44% 상승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전기요금 상승이 장기화할 경우 제조 원가 부담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이미 주요 반도체 기업의 전력 비용 부담도 상당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3분기까지 설비 인프라 유지 비용으로 각각 6조8695억원, 2조2505억원을 사용했다. 여기에 전력요금 상승까지 겹칠 경우 수익성 악화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중동 정세 불안은 원재료 공급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도체 웨이퍼 냉각에 필수적인 헬륨의 국내 수입량 중 64.7%가 카타르산인데 전쟁 여파로 카타르의 LNG 플랜트 가동이 중단되면서 공급 차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도체 식각 공정에 사용되는 브롬 가스 역시 국내 수입량의 97.5%가 이스라엘산으로 중동 의존도가 매우 높은 상황이다. 기업들이 수개월 분량의 재고를 확보해두고 있지만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소재 수급 불안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물류 비용 상승도 기업 부담을 키우고 있다. 중동 항로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유조선 운임 지수(World Scale)는 전쟁 전보다 두 배 이상 상승했다. 중동~극동 노선을 오가는 초대형 유조선의 하루 용선료도 약 21만달러에서 42만달러 수준으로 급등했다. 보험료 역시 크게 올랐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적용되는 전쟁 위험 보험료는 기존 선박 가액의 약 0.25% 수준에서 최대 3%까지 치솟았다. 과거 분쟁 당시에는 보험료가 최대 7배까지 할증된 사례도 있다.특히 해협 봉쇄로 우회 항로를 사용할 경우 해상 운임이 최대 50~80% 상승하고 운송 기간도 3~5일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수출 기업 입장에서는 물류비 상승과 납기 지연이라는 이중 부담을 떠안게 되는 셈이다.실제 에너지 가격 급등은 글로벌 경제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에너지 가격이 10% 상승한 상태가 1년간 지속될 경우 세계 인플레이션이 0.4%포인트 상승하고 글로벌 성장률은 0.1~0.2%포인트 둔화할 것으로 추산했다. 골드만삭스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까지 오를 경우 글로벌 성장률이 0.4%포인트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은 0.7%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고유가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도 거론된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물가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켜 경제 성장률을 떨어뜨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특히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충격이 더 클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수개월 지속돼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안팎까지 상승할 경우 한국 경제성장률이 최소 0.3%포인트 하락하고 소비자물가는 1.1%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여기에 전쟁 장기화로 원·달러 환율 상승까지 겹치면 기업들의 원가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환율 상승은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 비용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정부는 에너지 수급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원유 600만 배럴을 긴급 도입하기로 했다. 다만 이는 국내 하루 석유 소비량 기준 약 3일치 수준에 불과해 장기적인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중동 분쟁이 장기화할 경우 에너지 가격 상승과 물류비 급등, 글로벌 수요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국내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업계 관계자는 "유가 상승이 전력비, 물류비, 원자재 가격을 동시에 밀어 올리는 구조"라며 "글로벌 수요까지 둔화되면 제조업 전반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