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에 공영방송발전을 위한 시민연대 운영위원인 이창근 광운대 영상미디어학부 교수가 쓴 시론 '대선에서 중립 지킬 KBS 사장을'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누가 KBS 사장이 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 방송 역사상 방송사 사장 후임에 대해 지금처럼 관심이 증폭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곧 후임 사장을 대통령에게 추천하게 될 KBS 이사회가 소문대로 이미 차기 사장으로 내정돼 있다는 정연주 전 사장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때문일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정 사장 체제 하에서 KBS는 현정부의 이른바 개혁작업을 시사 보도 프로그램을 통해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KBS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균형 있게 보도해야 하는 공영방송의 보편적 원칙을 다반사로 무시했다. 탄핵방송은 그 단적인 예이다. 당시 KBS의 편들기 방송은 한국언론학회의 보고서에 의해 이미 지적된 바 있고, 최근 출간된 집필진의 후속 연구에 의해 다시 실증적으로 확인됐다. 이들 학자의 분석은 KBS가 말과 영상을 통해 어떻게 여당 편들기를 했는지 조목조목 보여준다. 야당의 탄핵 소추가 정당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보도하는 KBS가 공영방송답지 못했다는 것이다.

    1920년대 라디오 방송이 탄생하였을 당시, 공영방송의 발원지인 영국에서 정치인들은 전파를 이용하는 이 전대미문의 매체가 의회정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송의 위력을 간파한 주무장관 미첼-톰슨은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일단 방송이 정치에 개입하도록 허용하면, 앞으로 방송에서 정치를 몰아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혜안 때문이었는지 BBC는 오늘날 세계 공영방송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지금 민주화됐다는 한국에서는 공영방송을 정치 도구화하는 데 앞장섰던 사장이 재임에 내정됐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으니 영국 국민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이런 소문이 공분을 자아내지 못하고 버젓이 나돌 수 있는 한국의 풍토는 아마 지난 3년간 KBS가 정치적 중립성을 포기하고 집권당을 위해 선전해댄 방송 때문에 시청자들의 균형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정 사장은 지난 3년간 내년 대선에서 여당의 재집권을 위해 이미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그래서 집권층이 그를 더 원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KBS는 국민의 자산인 전파를 사용하며, 국민이 매달 납부하는 수신료로 방송하기 때문에, 대통령에 앞서 국민에게 충성하여야 한다. KBS 사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이때 ‘대통령’이란 행정부의 수장이 아닌 국가원수를 말한다. 따라서 KBS 사장은 국가원수가 대표하는 국민의 뜻과 이익을, 정치인이기도 한 행정부 수반의 그것에 우선해야 한다.

    KBS 이사회는 민주주의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 원칙에 투철한 신념을 갖고 내년 대선에서 정치권력의 간섭을 결연히 물리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는 의지와 용기를 갖춘 인사를 찾아 나서야 한다. 국민이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연주씨는 탄핵 때 불공정 방송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미 물러났어야 했다.

    일부에서는 정 전 사장에 대한 찬반 의견 표시를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며 온당치 못한 것으로 치부한다. 정치권과 언론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오로지 KBS가 바로서기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전임 사장의 지난 3년의 공과를 평가해 찬반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에둘러 말할 일이 아니다. 이 나라의 공영방송과 민주주의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KBS는 사장추천위의 후보 면담 과정을 방송하여 국민이 후보들의 됨됨이를 직접 살펴보고 판단할 기회를 마련하라.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