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김영수 산업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오리온 그룹 이화경 엔터테인먼트 총괄 사장은 동양그룹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의 둘째딸이다. 그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오리온 제과의 전신인 동양제과 기획실에 입사했다. 한창 일에 재미를 붙여갈 즈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시장을 개방한 분야가 어딘지 아세요? 바로 과자 시장입니다. 시장을 열어도 피해가 적을 것이라고 정부가 판단한 거지요. 당시에는 양담배를 피우면 잡혀가던 시절인데. 80년대 초 과자 시장 개방 발표를 들었을 때,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이제 망했구나 하고 낙담했지요.”

    예상대로 세계적인 다국적 과자업체들이 물밀듯이 한국 시장에 상륙했다. 토종 과자업체와 외국 과자업체 간에 일전이 벌어졌다.

    “한국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과자를 개발하고, 비용을 줄이고, 싼값에 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승부했습니다. 개당 100원짜리 초코파이가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다행히 소비자들은 달고 비싼 미국 과자를 찾지 않았어요.”

    최종 승자는 한국 과자업체였다. 브랜드 파워만 믿고 덤벼들었던 미국·유럽 과자업체는 줄줄이 보따리 싸고 한국을 떠났고, 다국적 과자업체와 싸워 이긴 한국 과자업체는 지금 중국·러시아·동남아시아에 과자를 수출하고 있다.

    이 사장은 “돌이켜보면 일찍 과자 시장이 열렸던 게 오히려 한국 과자 업계의 경쟁력을 키운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90년대 우리 자동차 시장을 개방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한국을 상대로 수입차 관세 인하 및 자동차 세제 개편, 외제차 소유자 세무조사 금지를 요구하며, 슈퍼 301조라는 무역보복에 돌입했다. 당시 정세영 현대차 회장과 김우중 대우차 회장, 김선홍 기아차 회장 모두 ‘한국 자동차 산업의 최대 위기’라며 펄쩍 뛰었다. ‘시장 개방은 안 된다. 국산차를 타자’며 소비자의 애국심에 호소했고, 일부에서는 외제차 유리창을 깨거나 흠집을 내는 테러 사건도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 자동차 시장을 개방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의 성적표를 보자. 지난해 한국에 들어온 외제차는 4만대. 현대·기아·GM 대우·쌍용 자동차가 수출한 차량은 365만대다. 미국에만 1년에 100만대(현지생산분 포함)를 수출했다.

    도요타 자동차는 한국 시장이 열리자 캠리와 아발론이라는 중형차를 들여왔다가 현대·기아차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하고 철수했다. 다시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로 상륙, 한 달에 600대 정도 팔고 있다.

    만약 우리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문을 닫고, 우리가 만든 차를 우리만 타고 다녔다고 상상해보자. 지금의 현대·기아차가 있을 수 있었을까?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 기업이라는 구글, 야후는 한국 시장에서 네이버나 다음, 네이트에 맥을 못 춘다. 네티즌이 요구하는 서비스 개발 속도가 느려서 소비자들의 선택에서 밀려난 것이다.

    SK 커뮤니케이션스 유현오 사장은 “싸이월드처럼 한국에서 개발한 서비스를 미국에 수출하는 시대”라며 “장벽 없는 시장에서 싸워 이겨야 진정한 국제경쟁력이 생긴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 시장이 열린다고 당장 한국 경제의 미래가 장밋빛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외국 농산물에 삶의 터전을 빼앗길 농민의 아픔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고, 기업들은 무한 경쟁에 내몰려 더 힘들고 피곤한 시절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시장 개방은 경쟁력 있는 자에겐 큰 기회다. 우리 농민과 기업이 최고의 제품으로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