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신우 논설위원이 쓴 시론 '추경예산이 어때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부가 수명이 다한 고리 원자력 발전소를 리모델링해 10년 더 사용키로 하는 한편 몇 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한다는 소식이다. 둘 다 평소 같으면 환경론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소동을 일으킬 사건임에도 웬걸, 요즘엔 너무나 조용하다.

    그게 다 국제 원유 가격 급등 탓이다. 환경론자들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짓지 말자고 하면 어쩔 수 없이 화력발전소 건설을 용납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전기값 상승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원자력 발전소 재앙론을 펴다가는 국민으로부터 ‘개념없다’는 소리를 듣기에 딱 알맞다. 즉 원자력 발전소 건설 반대가 명분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기침체 속도가 너무 빠르다면서 경기부양을 위해 추경(追更)예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다가 완전히 동네북 신세가 됐다. 심지어 구시대 인물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에 비춰 보자면 경기 침체가 아직까지는 참을 만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러나 만의 하나 경기가 불황의 기미라도 보이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반대론자들 역시 누구들처럼 ‘침묵 모드’로 들어갈 게 뻔하다.

    강 장관이 욕을 먹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아직은 추경예산 편성의 명분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추세가 계속되는 한 조만간 입장이 역전될 개연성이 있다. 강 장관으로서는 좀 더 참아야 할 시점이다. 우선 경기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28일 한국경제는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선언한 그대로다. 민간 전문가들 역시 아직은 위기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정부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며 정부 판단에 동의하고 있다.

    정부가 내세우는 추경편성 주장도 이론적으로 결코 밀리지 않는다. ‘작은 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추경예산을 짠다면 결국 ‘큰 정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반대론자들은 반박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정부가 쓰겠다는 돈은 추가로 세금을 거두거나 국채를 새로 발행해 빚을 지겠다는 게 아니다. 지난해에 너무 많이 거두는 바람에 쓰다 남은 돈 4조8000억원을 재원으로 삼겠다는 이야기다. 이 돈을 쓰지 않고 정부가 챙긴다는 것 자체가 민간 부문을 위축시키는 행위다. 다시 돌려줘야 작은 정부의 역할에 부합된다.

    두번째 반대론은 감세나 규제완화로 경기활성화를 꾀하라는 지적이지만 이런 조치가 정작 효과를 보려면 최소한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반면 재정 투입은 즉각적이다. 지금 당장 추경을 서두르지 않으면 스멀스멀 기어오는 경기하강을 막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에게 돌아간다는 게 정부측 주장이다. 아무리 들어봐도 정부가 맞다.

    세번째로 이명박 정부가 대기업에 비해 서민을 너무 소홀히 한다는 비난이나 이 역시 근거가 없다. 정부가 4조8000억원을 쓴다면 이는 대부분 건설공사에 투입, 서민 일자리 확충에 쓰이거나 저소득층에 대한 직접적 소득 환원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정부가 이 돈을 전부 대기업에 무이자 대출이라도 해줄까봐 잠이 오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경기부양책이 가뜩이나 심각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예단이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즉 현재의 물가 상승이 국내 수요 팽창이 아니라 국제 원자재 가격 앙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인플레이션 유발 경로가 서로 다르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강 장관 말대로 “(물가 상승으로) 용돈을 줄이느냐 아니면 일자리를 잃느냐의 선택”에서 과연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마땅하겠는가. 용돈조차 줄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절박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장기적 측면에서 성장잠재력 확충을 꾀해야 한다지만 케인스의 표현대로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어 있다. 치과 의사들도 이를 뽑기 전에는 소염제로 치통부터 가라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