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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큰 감투도 쓰지 못했고 돈도 벌지 못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다른 자부심이 있다. '아폴로 박사 조경철'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서민의 친구'란 애칭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감투라고 생각한다."
6일 별세한 우리나라 대표 천문학자 고 조경철 박사는 3년전 출간한 자서전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서해문집)에서 이렇게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고인은 두말할 필요 없이 단연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천문학자로 꼽힌다.
지난 92년 자신이 설립한 한국우주환경연구소의 '현직 소장' 직함으로 '우주 로켓'(별공작소)이란 저서를 별세하기 불과 석달 전인 작년 12월초 발간할 정도로 천문학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우주 로켓'은 고인이 청소년들에게 친근한 할아버지처럼 로켓의 구조와 원리, 우주와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조 박사는 과학의 대중화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실제로 두달 전도 채 안되는 작년 1월 강원 화천군에서 열린 창작썰매 콘테스트에 소설가 이외수 씨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일반 대중에게 다가간 천문학자였다.
수년전 TV 프로에서 ET로 분장한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속는 등 여러 대중매체에서 소탈하고 친근한 과학자의 모습으로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날 별세 소식을 접하자 마자 빈소를 찾은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장은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정말이지 우리 천문학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며 "고인은 천문학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우리가 우주로 나아가는 '정신적 문'을 열어주신 분"이라고 애도의 뜻을 감추지 못했다.
박 원장은 또 "고인은 일본어, 영어를 원어민 이상 자유자재로 구상한 그야말로 '탤런트'였다"면서 "어떤 측면에선 너무 일찍 태어나 그 분이 가진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후학들 대부분이 할 정도"라며 고인의 열정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와 관련, 대덕특구 소재 천문연구원 측은 소속 천문학자 대부분이 전세버스편으로 조문할 계획이고 천문학 관련 학회 관계자들 상당수도 빈소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평북 선천이 고향인 고인은 1947년 입학한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천문학 수업을 담당한 이원철 박사를 만나면서 천문학과 첫 만남을 가진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당시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꾸지만 "나의 후계자로 삼아 천문학자로 만들고 싶다"는 이원철 박사의 편지를 받고 천문학자의 길로 접어든다.
고인은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준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생방송에 관한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주한미군 방송을 보며 현장 상황을 동시통역하던 그는 착륙 성공의 순간 흥분한 나머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혀 훗날 많은 연기자들이 그의 모습을 재연하기도 했다.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천문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고인은 1965∼67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한국인 최초의 연구원으로 과학탐사로켓에 적재할 광전측광기 개발에 기여했다.
이어 미국 메릴랜드대 천문학 교수로 재직한던 1967년 당시 한국과학기술처가 창설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해외과학자 유치 계획에 호응해 유치 과학자로 귀국했다.
70년대에는 과학기술처 정책에 맞춰 현 한국천문연구원의 전신인 국립천문대 건설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집필활동에도 전념해 177권에 달할 정도로 한국 최대의 저술활동을 펼쳤으며 5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밖에 3천건 이상의 단편, 과학해설 및 일반 교양에 관한 글을 신문, 잡지 등에 기고했다.
1972년 미국 국무부 우주개발홍보 공로 표창, 1989년 헝가리 에오트보스(Eotvos)국립대학 아인슈타인 물리학상, 200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20세기의 탁월한 과학자 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2001년 일본 도쿄대학이 일본인 발견의 소행성(4976번)에 조 박사 이름을 헌정함에 따라 이 소행성은 'CHOU KYONG CHOL'이란 이름로 국제천문연맹(IAU)에 공식 등록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