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칸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들을 만났다. 시간이 지나서 일까. 서울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우승의 기쁨은 날려버리고 가뿐히 일상으로 돌아온 ‘프로’였다.

    제 57회 칸 국제광고제(Cannes Lions 2010) 영라이언스 필름 경쟁부문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1위에 오른 제일기획의 아트디렉터 김진형(30), 카피라이터 이성하(28)씨.

    우승 기쁨도 ‘잠시’..공항에서 회사로 ‘직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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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기획의 아트디렉터 김진형씨. 칸 우승 기념으로 후배가 자리를 장식해줬다고. ⓒ 뉴데일리

    이들의 수상소식에 금의환향을 꿈꿨을 법도 한데 실상은 달랐다. 이성하씨는 “월요일날 공항에 내리자마자 회사로 달려갔다”면서 “일주일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이 잔뜩 밀려있었다”고 전했다.

    김진형씨의 경우는 조금 나았다. 휴가로 며칠 더 머물다 왔기 때문에 조용히 출근한 그의 자리에는 후배의 깜짝 선물이 준비돼 있었다고. “무당집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장식이 자리에 걸려있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다. 출근하는 날에 맞춰 아침 일찍 나와 준비했다더라.”

    두 사람이 우승한 영라이언스 경쟁부문은 만 28세(우리나라의 경우 만30세) 미만의 젊은 광고인들이 펼치는 국가별 크리에이티브 경연대회로 필름, 프린트, 미디어, 사이버 등 4분야로 나뉜다.

    주제는 현장에서 발표되며 작업시간으로 이틀이 주어지나 오전 9시부터 저녁 8시까지로 시간의 제약이 따른다.

    “주제 우리에게만 어려운 것 아냐”..따뜻한 메시지로 승부수

    이번 필름 경쟁부문은 노키아 휴대전화를 사용해 세계동물협회가 고심하고 있는 동물학대 관광을 막을 수 있는 60초 짜리 모바일 광고필름을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

    김진형씨는 “사실 주제를 받고 가이드라인이 너무 많아 놀랐다”면서 혐오스럽거나, 여행자가 죄책감을 들게 해서는 안된다는 등 제약이 너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성하씨도 “영라이언스는 실험적인 시도가 주목을 받는데 제약 때문에 아이디어들을 다 가려내야 했다”고 전했다.

    이때 주제가 어려운 만큼 말이 되면 상도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두 사람에 머리에 스쳤다. 이들은 따뜻한 메시지로 승부수를 걸었다.

    “여행의 추억은 동물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여행상품에 포함돼 있어서 코끼리를 타고, 호랑이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김진형씨는 말을 이었다.

  • 여행은 사진으로 기록된다는데 착안, 사진에 작은 변화를 주기로 했다. 비주얼적으로 비슷한 사진, 위트 있는 모습들을 재치 있게 표현해 낸 것. 상아 뿔을 양 손에 들고 있던 남성의 손에는 커다란 수박이 들려있고, 코끼리를 타던 사람들의 모습은 버스 위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으로 바뀌는 등 이렇게 총 7커트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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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 국제광고제 영라이언스 필름 경쟁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한 제일기획의 아트디렉터 김진형 프로와 카피라이터 이성하 프로. ⓒ 뉴데일리

    느림의 미학? “4X6 사진 뽑는데 일주일 걸려”

    아이디어는 빨리 나왔지만 현지사정이 두 사람을 편히 놔두지 않았다. 

    이성하씨는 “현지에 가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왔는데 프린트부터 제대로 갖춰진 게 하나도 없었다. 합성으로 완성된 사진을 출력해야 하는데 칸 시내를 다 뒤져 찾아낸 사진관에서 4X6 이상의 사진을 뽑으려면 일주일이 걸린다더라”며 혀끝을 내둘렀다.

    결국 제일기획의 세미나 부스에서 프린트기기를 빌리고 또 현지에서 만난 한국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우여곡절 끝에 14장의 사진 출력, 촬영까지 마칠 수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 영라이언스 필름부문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리에 붙어있을 수 없었던 김진형씨는 문틈으로 심사위원들이 ‘대한민국’에 몰려있는 것을 보고 이성하씨에게 달려가 안겼다. 수상을 예감한 것.

    이성하씨는 “3등부터 발표를 하는데, 캐나다, 푸에르토 리코가 연달아 불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이름이 불릴 때 정말 가슴이 뜨거워졌다”면서 “장비나 여러 악조건이 많아 매일 뛰어다니면서도 일이 뒤틀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게 우승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년에도 ‘칸’으로 가는 두 사람

    사실 두 사람은 제작팀만 100명에 달한다는 국내 대형 광고회사답게 함께 손발을 맞춰 본 것은 처음이다. 칸으로 가기 전 두 차례 만나 이전 수상작들을 살펴본 것이 ‘스터디’의 전부일 정도다.

    김진형씨는 “수십 장의 사진을 펼쳐놓고 배경부터 시작해 팔, 다리, 얼굴 등 이미지를 만들고 있을 동안 성하가 광고카피에 음악까지 모두 뽑아놨더라. 완벽한 파트너였다”고 치켜세웠다. 이에 질세라 이성하씨도 “총 14컷의 사진 작업을 단 몇 시간 만에 해낼 사람은 이분 뿐”이라고 전했다.

    내년 6월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프랑스 칸으로 떠난다. 영라이언스 경쟁부문에서 우승한 팀에게는 다음 해 수백만원에 달하는 칸광고제 참관비와 항공권이 부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40여 개국 참가자들과 경쟁하느라 '칸'을 모른다는 두 사람이 내년에는 여유롭게 '칸'을 즐기기를 바란다.

    칸의 영광은 뒤로한채 업무로 복귀한 이성하 프로와 김진형 프로 ⓒ 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