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재 "1500원 가도 위기 아냐" 발언에 환율 방어 전선 '와르르'이찬진 금감원장 "RIA 출시 속도·마케팅 자제" 특명도 힘 빠져 정부 '150조 국민성장펀드' 등 당근책 무색…정책 엇박자 논란 서학개미 새해 2.8조 '탈출', 업계 "말 한마디에 공든 탑 휘청"
  •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공동취재단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공동취재단
    “한국은 대외채권국이다. 원화값이 1500원까지 가도 과거와 같은 금융위기는 아니다.” 

    지난 15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내놓은 이 발언이 금융투자업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와 금융당국, 증권사가 합심해 고환율 방어와 자본 유출 방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통화정책 수장의 안이한 현실 인식이 시장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이 총재는 전날 간담회에서 환율 급등 우려에 대해 “지금은 달러가 없는 위기가 아니라, 달러는 있는데 (환율 상승) 기대 때문에 안 파는 구조”라며 “1500원까지 가도 기업이 무너지는 위기 상황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 발언은 즉각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현재 금융당국과 증권업계는 ‘환율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고환율이 지속되자 증권사 임원들을 소집해 해외주식 투자 마케팅 자제를 강력히 주문했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금융사의 과도한 마케팅이나 이벤트를 자제하도록 지도하라”고 직접 지시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에 증권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해외 주식 투자 수수료 무료 혜택과 환율 우대 이벤트를 줄줄이 중단했다. 미래에셋증권 등 주요 증권사는 외화 예탁금 이용료를 인상하는 등 고객 이탈을 막고 해외 투자를 억제하기 위한 고육지책을 내놓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당국 압박에 마케팅을 전면 중단하며 손실을 감수하고 있는데, 한은 총재가 ‘위기가 아니다’라고 하니 힘이 빠진다”고 토로했다.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외화 유출 방지 정책 보따리’도 무색해질 처지다. 정부는 해외주식을 팔고 국내로 복귀하면 양도소득세를 감면해주는 ‘국내시장 복귀계좌(RIA)’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여기에 청년형 ISA 신설,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조성 등 세제 혜택을 총동원해 ‘서학개미’의 발길을 국내로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총재의 발언은 이러한 정책적 노력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환율이 1500원을 넘어도 시스템 리스크가 없다는 신호는, 역으로 투자자들에게 “달러 강세가 용인될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인투자자들은 올해 들어서만 미국 주식을 2조 8000억 원 순매수하며 이탈 가속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환율이 1500원을 찍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전에 나서는 것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 총재는 거시경제 펀더멘털을 이야기했겠지만, 심리가 중요한 외환시장에서 ‘1500원도 괜찮다’는 메시지는 환투기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며 “당국과 업계가 쌓아온 환율 방어벽이 말 한마디에 도루묵이 될 판”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이 총재는 “환율이 물가 상승과 서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문제는 있다”고 덧붙였으나, 시장은 ‘위기 아님’이라는 키워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정책 공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지금 중앙은행 총재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 시장의 혼란만 키우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날 오전 원달러 환율은 1472원대에서 움직이며 또 다시 1470원대를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