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국적없는 망명객의 외로운 독립투쟁

    임시정부에 부임하기 위해 상해로 밀항

       1920년 11월 15일 저녁 두 사람은 보스윅의 도움으로 배표도 없이 중국 직행 선박에 올랐다.  보스윅과 선장 사이에  두 사람을 몰래 태워도 좋다는 양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인 노무자들의 시체가 담긴 관들을 실은 배였다.
    갑판 아래 숨은 곳이 시신을 넣은 관들을 쌓아둔 창고였다.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다가 시체 냄새까지 지독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 ▲ 상해 체재시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1921. 4. 9). 일본에 의해 30만 달러 현상금이 걸린 이승만은 중국 체재 중에도 항상 신변의 불안을 느껴야 했다.
    ▲ 상해 체재시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1921. 4. 9). 일본에 의해 30만 달러 현상금이 걸린 이승만은 중국 체재 중에도 항상 신변의 불안을 느껴야 했다.


       배가 항구를 멀리 벗어난 다음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2등 항해사 앞에 나섰다.
    항해사는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이 몰래 배를 탄 것으로 여기고 선장에게 끌고 갔다.
       선장은 모르는 척하고 야단을 친 다음, 무임 승선을 대신 할 노동을 명령했다. 젊은 임병직은 청소를 맡고, 나이 든 이승만은 망보는 일을 맡았다.

       배는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처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 속에 끼어 통나무를 메고 육지로 무사히 상륙했다.

    상해에서 무장투쟁론자들의 공격을 받다.

       1920년 12월 28일에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으로서 집무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5개월간 이승만은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그 기간은 아주 힘든 시간이었다.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도 궁핍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이념 등으로 갈라져 격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이 베푼 환영회에 참석한 ‘임시대통령’ 이승만(중앙). 왼쪽 끝으로부터 손정도, 이동령,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 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이 베푼 환영회에 참석한 ‘임시대통령’ 이승만(중앙). 왼쪽 끝으로부터 손정도, 이동령,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가장 가깝게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거친 비판이 문제였다. 그는 함경도 출신의 공산주의자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동휘는 함경도 아전의 아들로서 서울에 올라 와 군사학교에서 러시아 교관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이었다. 그는 러시아 령으로 망명하여 공산주의자가 되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인물이었다. 상해에 온 그는 독립 노선을 문제 삼아 이승만 퇴진 운동을 벌였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군사 행동이 필요하며, 따라서 만주에서 무장 부대를 조직하여 국내에 침투시켜 일본 통치의 수단인 관공서를 폭파하고 관리를 암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력 행동은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므로,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미국의 지원을 전제로 하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승만은 당장의 무장투쟁은 일제의 탄압을 강화시키기고 한국인의 희생만을 늘리는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반대했다. 
      

  • ▲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둘째 줄 중앙에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정좌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 김구의 모습이 보인다.
    ▲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둘째 줄 중앙에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정좌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 김구의 모습이 보인다.


    분열의 극치에 이른 임시정부

       그러나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 속에서는 무장투쟁독립론이 우세했다.
       특히 북경지역에 있던 신채호의 비난이 격렬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을 살해하기 위해 김원봉의 의열단이 파견된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 덧붙여 임시정부의 의회에 해당하는 의정원에 포진한 안창호의 평안도 세력도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승만은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상해를 떠나려고 했다.

       이승만이 임시 대통령으로 있었던 1919-1925년의 5년 6개월 동안 상해 임시 정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보면, 독립운동가들이 지나칠 정도로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바꾸어 말하면, 지나칠 정도로 명분이나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자유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풍토에서 교육받고 미국적인 가치와 생활방식을 체득하게 된 이승만이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은 당연했다.

  • ▲ 이승만이 상해에 체류할 당시 줄곧 머물렀던 크로프트 목사의 저택 앞. 왼쪽 두 사람이 크로프트 목사 부처. 오른쪽 끝이 이승만.
    ▲ 이승만이 상해에 체류할 당시 줄곧 머물렀던 크로프트 목사의 저택 앞. 왼쪽 두 사람이 크로프트 목사 부처. 오른쪽 끝이 이승만.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의 외교를 통한 독립 전략을 맹렬히 비난했다.
       안창호도 이승만 비판에 가담했다. 그는 1919년에 파리 평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글 몇 줄 적은 문서를 제출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주장이었다. 
       안창호는 상해에서는 평안도,황해도와 같은 서북 지방 출신들  속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국민회와 흥사단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에 반대해 이동휘는 1921년 1월에 국무총리 자리를 내놓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그 뒤를 이어 학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도 연달아 사퇴하였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군중 대회를 열고, 미국에 의존하려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이 독립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북경에서도 만주, 시베리아, 미국에서 교포 단체 대표들이 모여 이승만을 성토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