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실험대에 오른 외교독립론
     
       그때 마침 미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가 태평양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9개국에게 해군을 감축하기 위한 군비 축소 회담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승만은 9개국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준비 작업을 해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으로 돌아갈 결정을 내렸다.

       1921년 5월 28일, 이승만은 상하이를 출발했다. 그리고는 마닐라를 거처 6월 29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부두에 나온 수많은 교민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으면서 이승만은  상해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그 여세를 몰아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를 조직했다. 그것은 상해에서 자신의 조직이 없음으로해서 받은 고통에서 나온 교훈의 산물이었다.

  • ▲ 워싱턴에 마련한 구미위원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승만, 비서 메이본, 법률고문 돌프, 뒷줄 왼쪽 서재필, 정한경.
    ▲ 워싱턴에 마련한 구미위원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승만, 비서 메이본, 법률고문 돌프, 뒷줄 왼쪽 서재필, 정한경.


       그리고 나서 그는 하와이를 떠나 군축회담이 열리게 될 워싱턴에 도착한 것이 8월 27일이었다.
       워싱턴 군축회의는 1921년 10월부터 1922년 1월에 걸쳐 열렸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서재필과 정한경도 대표단에 합류했다.
       한국대표단은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을 찾아 다니며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국이 독립되어 일본을 견제하는 ‘완충국’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설득 내용의 골자였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그의 평생 친구가 될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를 만났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미국 국민의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이 1년 전에 시체를 넣은 관 틈에 숨어 상해까지 몰래 항해한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기사를 신문에 싣도록 했다. 그것은 예상대로 적지 않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힘의 정치’가 국제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
     
       이승만은 휴즈 미 국무장관과 회담 사무총장에게 임시정부 신임장을 제출하고 회의 참석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최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본의 방해 때문이었다.
       차선책으로 이승만은 '옵서버' 자격이라도 얻으려고 했다. 그래서 신문을 통해 한국 문제를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계속 요구했다.
       이승만의 친구인 돌프 변호사는 미국이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 문제에 개입할 의무가 있다는 개요서(槪要書)를 제출하기도 했다. 

  • ▲ 이승만의 구미위원부가 발행한 100달러 짜리 공채, 앞면과 뒷면.
    ▲ 이승만의 구미위원부가 발행한 100달러 짜리 공채, 앞면과 뒷면.


       그러나 한국 대표단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은 기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새삼스럽게 ‘힘의 정치’가 국제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이승만을 더욱 더 절망케 한 것은 만나는 외국인들 마다  일본의 입장을 동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일본은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해외로 팽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 ▲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영국 작가 HG웰즈.
    ▲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영국 작가 HG웰즈.


       게다가 일부 재미 교포들의 비난도 그를 괴롭혔다. 서북 출신의 안창호를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하는 일부 재미 한인들은 이승만이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깎아 내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한국인들에게 동정하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저명한 기자이며 문필가인 H. G. 웰즈였다. 그는 여러 인사의 초청을 사양하면서까지도 이승만과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 시간을 냈다. 그는 극동 평화 유지에는 한국이 독립하여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는 완충국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했다.

    임시정부와의 결별
     
    미국에 돌아 온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국무총리 이동녕을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하려고 하였다.
        상해에서는 이승만 퇴진 운동이 더욱 더 거세져,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하는 의정원은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선정하였다.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이 별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한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가 들어있던 워싱턴 시내 건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가 들어있던 워싱턴 시내 건물.


       그러자 이승만은 1922년 9월에 하와이로 돌아 와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의 운영에 전념했다. 그리고 가끔 미국 본토를 드나들며 그의 독립운동 기구인 ‘구미위원부’를 감독했다. 워싱턴의 구미위원부 운영은 주로 임병직에게 맡겼다.  
       구미위원부는 미국의 여론을 한국인 편으로 만들기 위한 선전기구였다.
    그것은 언젠가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게 될 것이고 그때 한국이 독립하게 될 것이므로 미국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생각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계속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경고에 주목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 ▲ 1920년 3월 워싱턴의 포트랜드 호텔에서 구미위원들.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송헌주, 이승만. 김규식. 뒷줄 왼쪽 두번째 임벽직, 노디 김.
    ▲ 1920년 3월 워싱턴의 포트랜드 호텔에서 구미위원들.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송헌주, 이승만. 김규식. 뒷줄 왼쪽 두번째 임벽직, 노디 김.


      한편,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은 1925년 3월에 탄핵안을 통과시켜 이승만을 대통령직으로부터 면직시켰다. 그와 동시에 미국에서 이승만의 활동 기반인 구미위원부도 폐지하였다.  상해임시정부는 구미위원회가 하던 일을 안창호 지지 세력들이 쥐고 있는 국민회 중앙총회로 넘기게 하였다.

        그에 따라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의 공식적인 관계가 16년 동안 끊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자신을 다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애당초부터 그는 상해임시정부 보다는 한성 정부에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42년에 이르러 김구의 상해임시정부는 김원봉의 공산주의자들을 끌어 들여 좌우 합작 정부로 바뀌게 되었는 데,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이것을 아주 못 마땅하게 여겼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