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금 필요해도 '담보'·'신용등급' 부족하면 문전박대재정상태 좋은 중소기업엔 "대출 받아달라" 읍소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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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제작업체 사장 A씨는 운전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 문을 두드렸지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회사 신용등급이 낮아 대출이 어렵겠다는 말을 은행 직원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기술금융 대출을 이용하려 했지만 실패한 것이다.A씨는 "기술금융은 신용등급이나 담보를 요구하지 않은 채, 기술력만 본다는 언론 보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며 "이럴 바엔 일반 대출과 다를 게 무엇인가. 기술금융 대출을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기계부품 제조업체 사장 B씨 역시 기술금융 때문에 난감한 입장이다. 단, 이유는 정 반대다. 잦은 거래를 통해 친해진 주거래은행의 지점장이 "기술금융 대출을 받으라"고 연일 권하기 때문이다. B씨는 "지점장이 기술금융 대출을 늘리라는 윗선 지시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듯 보였다"며 "제발 자기 좀 살려달라고까지 하더라"고 말했다.B씨는 기계부품 제조업체 외에 무역업체, 부동산 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정말로 운전자금이 필요한 업체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나에게는 일단 대출하면 절대로 떼먹히지 않을 거라고 본 것인지, 계속 권한다. 기술금융의 씁쓸한 현 주소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최근 코스닥에 첫 주식 상장한 중소기업 회장 C씨는 IPO(주식공개상장) 간담회장에서 투자자들의 질문 공세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투자자들로부터 "재무 상태 양호하다고 그토록 강조하더니, 왜 부채 비율이 높은 것이냐"는 질문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C씨는 기자에게 "이제 돈 다 갚을 여력이 돼서 다 갚은 후 상장하려고 하는데, 은행 측이 제발 조금만 갚으라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웃었다. C씨는 "기술금융을 추가로 대출받아달라고 매달리는 걸 뿌리치느라 애를 먹었다"고도 했다.기술금융을 활성화하겠다는 금융당국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시중은행이 이를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가 편법으로 운영되고 있어 중소·벤처기업인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19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7월 486건 1922억원에 불과했던 일선 은행 기술대출 잔액은 지난달 6235건, 3조5900억원으로 규모가 커졌다. 넉 달 만에 대출 규모가 18배 넘게 급증한 것이다.기술금융은 잠재력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신용도나 담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벤처기업의 숨통을 틔워주자는 것이 주 목적이다. 하지만 부동산, 건설기계 등 그 형태나 시세가 있는 유형자산과 달리, 무형자산인 기술은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다. 현재 한국기업데이터(KED)를 비롯한 3대 기술신용평가기관(TCB) 평가를 활용하고 있으나,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게 현장의 전언이다.시중은행 한 지점장은 "은행 입장에서는 신용등급이나 담보를 볼 수밖에 없다"며 "순수 기술만 평가해 대출을 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기술의 담보가치를 객관적으로 환산할만한 기구가 있어야 기술금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정부가 외형에만 집착해 기술금융 대출을 독려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술금융의 의도는 좋지만, 우물에서 숭늉 찾듯 당장 실적을 강요하는 게 문제"라면서 "결국 이에 따른 부담은 은행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