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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한달 앞두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겪게 될 삶과 근무환경의 변화를 미리 살펴본다. 소득 감소와 고용 불안 등 부정적 영향도 예상되고 있지만, 워라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기대반 우려반이 공존하고 있는 곳도 있다. 주52시간 시행이 가져올 각 분야별 변화를 기획 시리즈로 짚어본다. <편집자주>
가구업계에 다니는 연구원 이명진 과장(가명·44)은 최근 웃픈 상황에 놓였다.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 바람이 불면서 퇴근 시간이 빨라졌지만, 일이 많은 업무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밤에도 근무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야근을 하면 고가 평가에 감점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어 "일을 하고도 오히려 욕을 먹는 상황"이 된 것.
김 과장은 워라밸 문화 조성으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었고, 개인적인 취미 활동을 하는 여건도 개선됐다. 회사에서도 주52시간 근무와 워라밸 문화를 조성하자는 취지로 회식이나 잔업도 줄어 전 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게 됐다.
그러나 연구원이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에 새로운 고민도 생겼다. 업무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 회사에서 천편일률적인 업무시간 단축으로 야근이 어려워졌기 때문.
타부서 동기들의 경우 일반적인 사무직으로 이러한 변화에 맞춤형 근무가 가능하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오후 6시 이후 나오는 연구원의 특성상 적어도 주 2일은 야근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다 회사에서 야근 할 경우 고가에 패널티를 주겠다는 운영 방침까지 마련한 탓이다.
이 과장은 이러한 회사의 정책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원해서 하는 야근이 아닌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야근하면서도 일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사유서 작성 및 고가 평가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
근무 시간 단축으로 여가 시간이 늘었지만, 김 과장은 야근이 있는 날이면 한숨부터 나온다. 앞으로 확산되는 워라밸 정책에는 직종에 따른 보다 세밀환 환경이 구축돼야 한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유통업계에서 근무하는 김현우(32·가명) 대리도 현장에 나가야 하는 날이면 걱정이 앞선다. 회사에서 주52시간 근무로 정시 퇴근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장을 방문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어서다.
이전 같았으면 오후 5시께 현장을 찾아 상황을 살핀 뒤 오후 8시쯤 퇴근을 하는 스케줄로 움직인다. 그런데 회사에서 주52시간 정책을 시행하고부터는 현장에 방문하기에 앞서 야근과 관련한 사유서부터 제출해야 한다.
일하면서도 눈치를 보고 사유서까지 써야 하는 셈. 사무직 동기들처럼 정시 출·퇴근을 하고 싶어도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야근이 왜 고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김 대리는 현장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정시 퇴근으로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장에 나가는 날만 되면 일찍 퇴근하지 않는다고 회사에서 사무직과 같은 잣대를 들이미니 답답할 노릇이다.
삶의 여유와 행복을 중시하는 변화한 기업 문화는 가족과의 시간은 물론, 취미 생활까지 즐길 수 있어 반갑다. 그러나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근무시간 단축은 오히려 동기 부여만 하락시킨다고 김 대리는 푸념한다.
"자유 시간이 늘었지만, 일하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니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