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 엘스' 전용 84㎡ 한 채를 세 놓은 A씨는 지난주 은행에서 5000만원을 빌려 세입자에게 송금했다. 계약 갱신을 앞둔 이 아파트 전세 시세가 재작년 2월보다 5000만원 내렸는데, 세입자에게 돌려줄 현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세 낀 아파트는 담보대출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세입자가 일단 동사무소에 전출신고를 하고 A씨가 은행에서 돈을 빌린 뒤 세입자가 다시 전입신고를 하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A씨는 "작년 가을만 해도 전셋값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여서 이런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거래 위축으로 집값과 전셋값이 동반 하락하면서 전국적으로 전셋값이 계약 시점인 2년 전 시세 밑으로 하락한 지역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방은 2년 전 전셋값에 비해 하락 폭이 점점 커지고, 서울에서는 강남권 4개구는 물론, 일부 강북권 전셋값도 2년 전보다 낮거나 비슷해진 곳이 늘고 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재계약을 앞두고 전세금 인상에 대한 부담은 줄었지만, 2년 만기가 끝난 뒤 전세금을 제 때 돌려받지 못하는 역전세난 우려도 커지면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금융당국은 전셋값 급락 지역을 중심으로 '깡통전세'에 대한 실패 파악에 나서기로 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1월 말 기준 전국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11곳의 아파트 전셋값이 2년 전(2017년 1월)보다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평균 아파트 전셋값이 2년 전보다 2.67% 하락한 가운데 울산 전셋값은 마이너스(-) 13.6%로 가장 많이 떨어졌다. 조선 경기 위축 등으로 전세수요가 감소한 반면, 경남 일대 새 아파트 입주물량 증가로 전셋값 하락폭이 커진 것이다. 울산 북구의 경우 현재 전셋값이 2년 전에 비해 20.8% 떨어져 있다.
경남 역시 2년 전에 비해 11.2% 내려 전국에서 두 번째로 하락폭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업체가 몰려 있는 거제시는 2년 전에 비해 34.9% 하락해 전국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실제 이들 지역은 '깡통주택'과 '깡통전세' 문제로 지난해부터 임대차 분쟁이 심각한 상황이다.
깡통주택은 매매가 하락으로 전세와 대출금이 매매 시세보다 높은 주택을, 깡통전세는 이로 인해 전세 재계약을 하거나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경우 세입자가 전세금을 다 돌려받지 못하는 주택을 말한다.
지난해부터 집값이 약세를 보이고 있는 부산 아파트 전셋값은 2년 전보다 2.36% 하락했다. 이어 △경북 -8.10% △충남 -7.08% △세종 -5.47% △충북 -4.01% △제주 -3.71% △강원 -2.62% 등도 2년 전보다 전셋값이 많이 내렸다.
-
문제는 역전세난 '삭풍'이 수도권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 전셋값은 2년 전보다 3.6%, 인천은 0.26% 낮은 상태다.
경기도는 정부 규제와 새 아파트 입주물량 증가 등으로 전체 28개 시 가운데 21곳의 전셋값이 2년 전보다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지역 75%에서 역전세난 우려가 커진 것이다. ▲안산 -14.4% ▲안성 -13.4% ▲평택 -11.0% ▲오산 -10.0% 등의 경우 낙폭이 두 자릿수에 달했다.
서울도 예외는 아니다. 해당 조사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아직 2년 전에 비해 1.78% 높다. 하지만 앞으로 1.78% 하락할 경우 역전세난이 발생할 수 있다.
이미 강남4구의 전셋값은 2년 전보다 0.82% 떨어진 상태다. 서초구의 경우 2년 전에 비해 3.86% 하락했고, 송파구도 2년 전 시세보다 0.88% 내렸다. 강남구(0.02%)는 사실상 2년 전 가격 수준이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 자료를 보면 송파구 잠실동 '잠실 엘스' 전용 85.8㎡는 2년 전 1월 말 전세 실거래가가 8억5000만원이었으나, 올해 1월 말에는 7억8000만~8억3000만원으로 최대 7000만원 하락했고 이달 초에는 1억5000만원 낮은 7억원에 전세 계약이 이뤄졌다.
2년 전세계약이 만기되고 지금 재계약을 한다면 수천만원의 전세보증금을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셈이다.
서초구 반포동 '반포 자이' 전용 59.9㎡는 2017년 1월 8억4000만~8억8500만원에 계약됐는데, 올해 1월 말 계약된 전셋값은 이보다 2000만~6000만원 낮은 8억2000만원이다.
강남권은 최근 재건축 이주 단지 감소와 송파 '헬리오시티' 등 대규모 재건축 단지들의 입주물량이 증가하면서 전셋값 약세를 주도하고 있다.
부동산114 시세 분석 결과 지난해 10월 말에 비해 강남4구의 전셋값은 1.48% 하락해 강남4구 이외 지역 -0.53%에 비해 낙폭이 3배가량 높았다.
-
강북에서도 최근 하락세가 나타나면서 현재 도봉구 전셋값은 2년 전보다 0.40% 낮다.
도봉구 창동 '북한산 아이파크' 전용 84.4㎡는 2017년 1월과 2월 4억~4억2000만원에 전세 계약이 이뤄진 데 비해 지난해 12월에는 4억원, 올해 1월에는 3억5000만원으로 실거래가가 내려갔다.
용산구 0.56%, 노원구 0.06% 등지도 아직 2년 전 이하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역전세난의 사정권이다.
이미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지난해 11월 이후 올해 1월까지 3개월 연속 하락해 시 평균 전셋값이 2년 전 시세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문석이 나온다.
노원구 상계동 A공인 대표는 "요즘 전세를 빼려면 2년 전 시세보다 최소 1000만원 이상 낮춰줘야 한다"며 "계약 만기가 지나도록 빠지지 않은 전세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역전세난이 이어지면서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새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전세금을 빼주지 못하면 집주인이 신용대출이나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돈을 마련하고, 이 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급매가 나오면서 집값이 빠르게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 대출 규제가 심한 만큼 이 같은 분위기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국토연구원 관계자는 "올해 아파트 준공물량은 39만2000호로, 지난해 44만3000호에 이어 신규 입주물량이 상당하다"며 "이 같은 입주물량 과잉이 전셋값은 물론 주택 매매가격의 하락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입주물량 증가로 전세시장 약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역전세난 문제에 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올해 서울 지역 입주물량은 9500여가구의 송파 헬리오시티를 포함해 지난해 두 배 수준인 5만가구가 넘는다. 경기 입주물량은 지난해보다 3만가구 정도 줄지만, 2015년의 두 배가 넘는 13만7000여가구가 대기하고 있다.
양지영 R&C연구소 소장은 "원래 이사철에는 수요가 발생하고 전셋값이 올라야 하는 상황이지만, 입주물량이 워낙 많다보니 역전세난이 심화되고 있다"며 "올해도 서울 동남권을 중심으로 입주물량이 전체적으로 많은 추세인 만큼 연말까지 관련 지역 중심으로 추이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김은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정부 규제로 매매가가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역전세난이 지속되면 집값 하락세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며 "깡통주택·깡통전세 등에 따른 대출 부실화 가능성에 유의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
금융당국은 이에 조만간 올해 가계부채 주요 리스크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깡통전세와 역전세난에 대한 실태파악에 나설 방침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지난달 열린 가계부채관리 점검회의에서 "지난해 높은 증가세를 보인 전세대출은 부실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국지적인 수급불일치 등으로 전셋값이 하락해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할 위험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전세자금대출은 92조3000억원으로, 2015년 말 41조4000억원보다 50조원 이상 늘었다. 신용대출을 전세금에 보태는 경우가 많고, 전셋값 대비 전세대출 비율 등 기본적인 자료가 없다보니 실제 관련 부채는 훨씬 클 것으로 분석된다.
당국은 깡통전세 문제가 좀 더 심각해질 경우 역전세 대출을 해주거나 경매 유예기간을 연장하는 방안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과 SGI서울보증의 전세금반환신용보험에 가입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예금보험공사가 대주주인 SGI서울보증과 공기업(준시장형)인 HUG는 임차인을 계약자로 하는 전세보증금 보장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 상품은 임대인이 전세계약이 끝난 지 1개월이 지나도록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거나 전세기간 중 집이 경매나 공매로 넘어갔을 경우에 대비하는 상품이다.
HUG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발급은 8만9350건(19조364억원)으로 전년 4만3918건(9조4931억원)보다 두 배 이상 늘었고, 반환보증 사고는 372건으로, 전년 33건에 비해 급증했다.
안명숙 우리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부장은 "강남은 수개월째 전세가 안 빠져 고통받는 세입자가 늘고 있고, 강북에서도 역전세난이 나타날 조짐"이라며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전세금 반환보증 상품에 가입해두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