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은 경제 아닌 정치 문제"정치프레임에 경제·산업 휘청"감정싸움 지양, 국민 설득해야"
  •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위안부 합의 파기와 강제징용 배상판결에서 비롯된 정치·외교 문제가 일본의 경제제재를 시작으로 초유의 경제전쟁이 번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경제제재는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시작된 양국 무역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일각에선 한일관계가 어그러지면서 벌어진 1997 IMF 사태가 회자되며 심각한 경제위기론도 제기된다.
  •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 뉴시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 뉴시스
    정치가 외교 문제로… 발빠른 일본, 향후 시뮬레이션 '착착'

    일본의 경제보복의 파고는 결코 작지 않을 전망이다. 일본이 수출규제에 나선 반도체 핵심 소재의 대일 의존도는 사실상 100%다. 반도체가 한국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달하는데, 일본의 경제제재가 강화될수록 우리가 입을 타격은 걷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골치아픈 지점은 이 문제가 양국간 실리를 찾는 분쟁이 아니라 역사적·정치적 감정싸움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양국 정부는 정권이 바뀔때마다 '친일(親日)' 또는 '혐한(嫌韓)' 논란으로 진통을 겪곤 했다. 이번 사태도 문재인 정권과 아베 정권 사이에 오래동안 방치된 곪은 종기가 터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본 정부가 시작한 경제제재는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의 핵심 소재에 대한 통관 절차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이다. 명분으로는 '신뢰 관계 훼손'을 내세웠다. 아베 총리는 지난 7일 "(한국이)강제징용에 대한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는 "단지 강제징용자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양국 간 신뢰 관계가 무너졌다"는 수위 높은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경제보복 이면에는 그동안 우리 정부가 취해온 반일 정책에 대한 반감이 내재돼 있다. ▲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 한일 위안부 협정 파기 및 화해치유재단 공식해산 등 법적인 사안 외에도 정치권에선 '토착왜구' 등 반일 감정이 가득한 프레임도 횡행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파기된 한일 위안부 협정(2015)도 다분히 감정적 대응이 아니였느냐는 평가도 나온다.

    오랫동안 별러온 사안인 만큼 일본 정부의 대응은 발빠르다.

    지난 4일 일본 참의원 선거 공시일을 기점으로 1차 경제보복 조치를 시작했고 오는 18일 2차 조치도 시점을 못박았다. 일본은 2차 경제조치 시점에 맞춰 위안부 및 강제징용 문제를 제3국 중재위를 설치해 맡기자는 제안으로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더불어 일본은 수출규제 강화 품목인 불화수소(애칭가스)의 북한 유입설을 흘리며 한국의 무역관리 책임론도 수면 위에 올렸다. 경제보복 명분에 북한이란 안보상 명목까지 포함시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명분과 정당성을 차곡차곡 쌓은 뒤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 추가 대응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다.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이 사안의 본질은 경제가 아닌 정치"라며 "정치적 문제 때문에 우리 기업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했다.
  •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 뉴시스
    정부 미온적 대책만… 반일·혐한 장기화 우려

    반면 우리 정부는 아직 미온적 태세다.

    대외적 대응기조는 WTO 제소 등 국제 여론에 기대는데 그치는데다, 대내적 대책도 기약하기 힘든 기초소재산업 육성에만 치우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9일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일본의 경제보복에 때라 소재부품 산업의 육성이 시급해져 추가경정 예산에 필요한 예산을 국회에 더 요청드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총리는 현 정부에서 몇 안되는 일본 정치권과 가까운 인사지만, 이날 국무회의에서는 말을 아꼈다.

    여기에 정치권은 대통령 책임론만 외치고 있고, 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 규제 발표 일주일 만에서야 규제철회를 요구하는 등 한발짝 느린 대응이다.

    특히 10일 예정된 문 대통령과 30대 그룹 총수들과의 간담회도 부정적 시각이 강하다. 수출입 활로가 막힌 기업 입장에서 가감없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겠냐는 지적과 함께 정부가 자초한 외교문제에 재계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일 외교문제는 민이나 관 단독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며 "민간기업 목소리를 빠짐없이 듣는 노력이 우선"이라고 했다.

    미적대는 정부 기조 속에 분열되는 여론도 우려된다. 한일 경제위기의 책임이 이전 정부에 있다는 정치권 공방이나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같은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움직임들이다.

    민주당은 '일본경제보복대책특위'를 구성하고 일본의 참의원 선거가 끝나는 21일 이후 본격 활동을 시작키로 했다. 반일 프레임을 장기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속내로 보인다.

    반면 야당은 이번 사태를 문재인 정부의 경제·외교 무능의 결과로 몰며 대통령 책임론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확산되고 불매운동이 언급되는데, 이런 때일수록 정부와 정치권의 침착한 대응책과 논의가 요구된다"고 했다.
  • ▲ 지난 2103년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가 구미 불산 유출 현장 방문 후 올린 SNS 글 ⓒ 캡쳐
    ▲ 지난 2103년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가 구미 불산 유출 현장 방문 후 올린 SNS 글 ⓒ 캡쳐
    결국 문제 해결 주체는 정부… 국론 통합이 우선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지난 2018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면서 제기된 우려에 "역사 문제와는 별도로 한일 외교관계를 회복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일 양국이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딛고 진정한 마음의 친구가 되길 바란다"고도 했고, "(우리)정부가 빠른 시일 내에 후속 조치를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거치며 한일 외교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정부가 내놓은 이렇다 할 대책은 전무하다. 이제와서 '대통령-여야 5당 대표 회동'을 통한 대안 모색에 나선 것도 책임감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대상 3개 품목 중 하나인 불화수소(에칭가스)는 구미 불산누출 사고 이후 강화된 환경규제로 국산화가 지연된 대표적 사례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은 현장방문 후 올린 SNS글을 통해 "(사고 후)열흘이 지났는데도 목과 눈이 따갑고 얼굴이 따끔거렸다"며 향후 공장건설에 부정적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오히려 정치권과 재계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특별법 부터 보상절충안 등 다양한 방법론이 나오고 있다. 책임소재 공방보다 심각한 경제위기 타파가 우선이란 얘기다.

    여당 일본통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한일 대결구도가 불가피한 감정싸움은 지양해야 한다"며 "정치권이 나서 국민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 정부 핵심인사였던 야당 중진 A의원도 "결국 대통령의 결단이 관건"이라며 "대통령이 직접 아베 총리와 담판을 짓고 국민 앞에 소상히 설명하는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