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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예부터 ‘밥심’을 강조했다. 든든한 쌀밥과 갖은 반찬이 건강의 원천이라는 정신은 아직도 우리 일상에 켜켜이 배어있다. 빵·면 등 다양한 대체재가 등장했다고 해도, 한국 밥상의 주인공은 여전히 ‘쌀밥’이다.
쿠첸은 지난 1월 밥맛연구소를 설립했다. 식문화 변화 속 소비자가 선호하는 ‘요즘 밥맛’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밥솥에 녹여내기 위해서다.
연구소는 세 갈래로 구성돼있다. 밥솥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소프트웨어팀(SW· Software), 연구내용을 밥솥에 적용하는 하드웨어팀(HW·Hardware)과 디자인 등 외관을 연구하는 기기팀(CA·Cooking Appliance)이다. 그중 밥맛 연구 담당하는 것은 SW팀에 소속된 ‘알고리즘 파트’다.
지난 6일 쿠첸 천안연구소에서 이미영 알고리즘 파트장과 홍다해 연구원을 만났다. 이미영 파트장은 지난 2009년 쿠첸에 입사해 12년째 밥맛 연구를 전담하고 있다. 2013년 입사한 홍다해 연구원도 7년 차 베테랑이다.
이들은 식품공학과 영양학을 각각 전공했다. 밥맛 연구원이 된 계기는 쌀밥이 우리나라의 주식(主食)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껴서다. 쌀밥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올해 초엔 이 파트장과 홍 연구원을 포함 총 3명의 팀원이 ‘밥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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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취반협회가 인증하는 이 시험엔 매년 400여 명이 응시한다. 합격률은 50% 정도로 다소 까다로운 편이며, 응시자 대부분은 아시아권 식품 회사 직원과 연구원이다. 소믈리에 자격은 1차 필기시험, 맛을 보는 2차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주어진다.
이미영 파트장은 “국내엔 시험 관련 서적이 없어 기출문제를 일본어 사전으로 번역해가며 시험을 준비했다”면서 “실기 시험의 경우 샘플로 주어진 쌀밥과 가장 유사한 맛을 가진 밥을 3개의 보기 중 골라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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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반복되는 연구소의 주 업무는 밥 짓기다. 매월 소비하는 쌀만 20kg씩 160포대로 총 3200kg에 달한다. 이는 약 3만2000인분(1인분 100g 기준)에 달하는 양이다. 실험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혼합미를 사용한다.
두 사람이 10여 년간 연구소에 근무하며 겪은 에피소드도 많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난 2017년 출시한 적외선 밥솥 ‘IR미작’과 관련한 이야기다. 당시 쿠첸이 야심차게 준비한 IR미작은 가마솥밥, 뚝배기밥 등 한국 특유의 밥맛과 향을 그대로 구현한 게 특징이다.
홍다해 연구원은 “가마솥, 뚝배기 밥맛을 기기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진짜 솥밥맛이 뭔지 알아야 했다”면서 “한 달을 꼬박 연구소 인근 병천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서 밤낮으로 밥을 지었다. 현장에선 태우지 않고 고소한 밥맛을 내는 솥 온도 값을 추출해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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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얻은 결과는 2년간의 연구를 거쳐 제품으로 탄생했다. 추출한 온도를 기기에 적용할 개발 언어로 변환하고, 그를 바탕으로 메뉴별로 특화된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구수한 향이 특징인 가마솥밥 모드는 센 열기에 장시간 가열하고, 찰밥의 경우 뜸을 오래 주는 패턴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최근엔 쌀·현미 등 주요 곡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메뉴에 적용한다. 이미영 파트장은 곡물에도 트랜드가 있어, 유행을 빨리 쫓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유행은 병아리콩, 귀리 등으로 대표되는 슈퍼 곡물이다. 요즘 연구소는 곡물과 관련한 트랜드를 분석하고, 이에 최적화된 조리모드를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 파트장은 “예전엔 그저 찰진밥이 맛있는 밥으로 평가됐지만, 최근엔 냉동밥 해동과 잡곡밥 등 밥솥 사용 패턴이 다양해져 연구과제도 다양해졌다”면서 “사용자 밥맛 취향, 원하는 기능이 많아진 만큼 신메뉴 개발 주기도 빨라지고 콘텐츠 고민도 많아진 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쌀 소비량 감소, 밥솥 판매 정체 등 최근 시장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밥솥 시장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밥을 주식으로 하는 쌀 문화 국가인 만큼 관련 연구는 필수적이라는 의견이다. 현재는 밥솥 경쟁제품으로 즉석밥 등 새로운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만큼 다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미영 파트장은 “연구소의 장기 목표는 즉석밥 등 예전과 다른 라이벌의 등장에도, 밥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소비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라며 “트랜드 분석과 신메뉴 개발 등 다양한 차원의 접근을 통해 소비자를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제1의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