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여파, 수요 회복 더뎌… 재고 최소화수직계열화 넘어 '배터리-모빌리티' 등 비정유 부문 확장전례 없는 위기 지속… "생존 위한 포트폴리오 확대 선택 아닌 필수"
  • ▲ 주유. ⓒ정상윤 기자
    ▲ 주유. ⓒ정상윤 기자
    정유업계가 공장 가동률을 낮추기 시작했다. 정제마진은 5주 연속 플러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상반기 손실을 만회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자 아예 생산을 줄이기로 했다.

    공장가동률을 재차 높이기에는 리스크가 큰 만큼 비정유 부문을 확대해 손실을 줄이는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SK에너지는 울산에 위치한 공장 가동률을 70%대까지 낮췄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가동률을 83%까지 낮춘 적은 있지만, 70%까지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코로나19 충격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SK이노베이션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원유 정제공장은 설비 특성상 가동을 시작하면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유 등 모든 석유제품을 생산한다. 판매량이 많은 제품만 뽑을 수 없기 때문에 시황이 안 좋을 때는 가동률을 낮춰 재고를 줄인다.

    SK에너지 측은 2주마다 시황을 면밀히 검토해 가동률을 조정한다는 방침이다. 당분간은 가동률을 높이더라도 소폭에 그칠 것으로 알려졌다.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등 다른 정유사들도 올해 정기보수 시기를 조정하면서 가동률 조정을 진행한 바 있다. 생산한 제품을 손해를 보고 팔기보다는 이익이 줄어들더라도 차라리 정기보수나 가동률 조정을 통해 생산량을 낮춰 손실 폭을 축소하겠다는 셈이다.

    국내 정유업계뿐만 아니라 해외 정유사들도 가동률을 낮췄다. 미국 전체 정제공장 가동률은 77.1%로, 전년동기(83~95%)보다 약 10%p 하락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중국의 국영 정유업계 역시 가동률을 높였다가 최근 73.6%로 떨어뜨렸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 석유수요 급감으로 정제마진이 계속 하락하자 글로벌 정유업계가 가동률을 낮춰 위태롭게 대응하는 상황"이라며 "국내 정유4사의 평균 가동률은 70%대로 떨어졌고, 더 낮추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10월2주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배럴당 1.5달러로, 9월3주(0.6달러) 이후 5주간 플러스 마진을 기록했다. 올해 5주 연속 플러스 마진을 기록한 것은 1월1주~3월2주 이후 처음이다.

    3월3주부터 6월2주까지 13주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8월 이후부터는 마이너스 마진이 세 차례에 그치는 등 점차 개선되는 분위기다. 금액도 0달러대를 넘어 10월1주에는 2.0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정제마진은 정유사의 대표적인 수익성 지표다. 정유사는 원유에서 휘발유·경유 등을 정제해 제품을 만든다. 통상 정제마진은 4~5달러는 유지해야 수익을 남기는 구조다. 마이너스면 손해를 보고 제품을 판매하는 셈이다.

    최근 들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하면서 석유제품 수요가 점차 늘고 있고, 특히 항공업계의 국제노선이 재개되면서 항공유 가격도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유업계는 이 같은 마진 개선에도 여전히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코로나19 확진 판정, 기대에 못 미친 미국 고용지표, 리비아의 증산 가능성 등으로 국제유가가 30달러대로 급락해 착시효과를 보였다는 것이다. 유가는 40달러 선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유가 변동뿐만 아니라 코로나19, 허리케인 등으로 가동이 중단됐던 글로벌 정유사들의 공급이 재개되면서 휘발유와 항공유의 마진이 다시 하락하는 움직임이다. 수요도 2분기와 3분기 최악의 상황에 비해 나아졌을 뿐 예년 수준의 회복은 아직 요원하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상반기까지만 하더라도 코로나19 회복을 기대하면서 적자를 보더라도 제품을 생산해 재고를 미리 확보해두자는 분위기였다"며 "이제는 사태 진정을 기다릴 수만은 없다보니 생산량을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연내 공장가동률이 다시 높아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 SK 울산 CLX. ⓒ성재용 기자
    ▲ SK 울산 CLX. ⓒ성재용 기자
    정유 부문의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정유사들도 '비정유' 부문을 중심으로 중장기 생존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전기차 수요 확대에 발맞춰 글로벌 배터리 시장을 잡기 위해 공격적으로 신·증설에 나서고 있다.

    국내를 비롯해 중국, 헝가리 등에 사업장을 두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은 중국 옌청, 미국 조지아, 헝가리 코마롬 등에 배터리 생산 공장을 추가로 증설해 글로벌 점유율을 빠르게 확보하고 있다.

    연내 옌청공장(20GWh) 증설이 마무리되면 SK이노베이션의 누적 생산량은 39.7GWh로 늘어난다. 여기에 2023년까지 조지아1·2공장, 코마롬2공장까지 완공되면 생산능력은 71GWh로 확대된다.

    현대오일뱅크는 자회사 현대케미칼을 통해 원유정제 부산물을 활용, 석유화학제품 생산성을 높이는 HPC(Heavy Feed Petrochemical Complex)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현대오일뱅크는 자회사인 현대케미칼과 현대코스모를 통해 파라자일렌 등을 생산하는 아로마틱스 사업만 영위해왔으나, 이번 프로젝트로 올레핀 분야에도 새롭게 진출했다. 이로써 정유-석유화학 수직계열화를 한층 강화하겠다는 복안이다.

    HPC공장에서는 정유과정에서 나오는 중질유, 부생가스 등을 원료로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등을 생산한다. 2021년까지 설비투자를 완료할 계획으로, 연간 폴리에틸렌 75만t, 폴리프로필렌 40만t을 생산하겠다는 방침이다.

    GS칼텍스는 모빌리티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양한 모빌리티가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주유소의 장점을 살려 주유, 세차, 정비 등 일반적인 서비스뿐만 아니라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수요 증가와 모빌리티 환경 변화에 대응해 전기차 충전, 수소차 충전 등 다양한 서비스 거점으로 삼겠다는 것이 목표다.

    차량을 시간 단위로 대여하는 카셰어링, 전동킥보드와 같은 마이크로 모빌리티 정차 및 충전장소로도 제공할 방침이다.

    최근에는 비운전자를 위한 모빌리티 사업도 확대하고 있다. GS칼텍스는 최근 드론과 로봇을 활용한 배송서비스를 시연했다. 모바일 앱으로 GS25 편의점 물품을 주문하면 드론이 해당 제품을 적재해 운반하고 이를 자율주행 로봇이 넘겨받아 배송지까지 전달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유 부문의 실적 하락이 가파른 상황에서 비정유 부문은 2015년 이후 양호한 이익 창출을 통해 정유사들의 실적 안정성을 높여왔다"며 "최근 들어 전례 없는 위기가 지속되면서 생존을 위해 변동성이 큰 정유업에서 벗어나 부가가치가 높은 배터리, 석유화학, 모빌리티 등 비정유 부문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